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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분의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생활하시는 <형제건강원>에는 ‘복길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개가 같이 살고 있다. 철대문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신경을 쓰는 사이에 언제나 먼저 인기척을 알아채고 크게 짖곤 해서 사람을 놀래키는 놈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방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궁금했지만, 이런저런 인사치레가 끝나고 나서야 넌지시 복길이 안부를 물었다.

밥상 물리기가 무섭게 복길이 먹을거리를 챙기시던 분들이 설마 개장국을 좋아하시기는 하지만 ‘복날 음식’으로 어찌하지는 않았을테고, 개값이 올라서 개소주 만드는데 사용하셨을까? 제탕기는 오늘도 김을 식식거리며 내뿜고 있는데….

선생님들은 복길이 얘기를 묻자 싱글벙글하시며 뒷곁에 가보라고 하셨다. 복길이는 장기수 송환을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날 네 마리의 탐스런 새끼를 낳았던 것이다.

복길이는 눈도 아직 못 뜬 제 새끼들을 지키느라 뒤란 제 집 앞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평소 만만하게 보고 엉겨붙으며 좋아하던 우리 아이도 으르렁거리며 무는 시늉을 하는 복길이의 모습에 겁을 먹고 입술이 파래졌다.

'그래, 북녘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살아오신 선생님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자란 네 마음이 여느 개와 같지는 않으리라.'

99년 2월 출소하신 최선묵, 최수일 선생님과 먼저 출소하여 대전 근교에서 생활하고 계시던 한장호, 김용수 선생님이 함께 운영해오신 <형제건강원>은 시작한 지 6개월만에 '파장'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여기저기 참석해야 할 자리도 많고, 슬슬 정리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출퇴근을 하시던 김용수, 한장호 선생님은 더 이상 건강원에 나오시지 않으신다. 약제를 다리고 침을 놓는 일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줄이고, 한 독지가가 기증했던 탕제기 처리문제도 고심 중이다.

"마음이 들뜬다거나, 잠을 못 이룬다거나 하지 않아요. 송환이 결정된 후로도 별로 달라진 것 없지요."
기분이 어떠시냐고 묻는 질문이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잘못되어 못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안해요. 지나온 수 십년에 비하면 뭐..."
“그래도 지켜보는 사람은 불안해요. 마지막까지….”

남북정상회담으로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이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는 지금도 곁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가슴 한구석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굳게 믿고 지켜온 선생님들은 잠시의 우여곡절에 일희일비하시지 않는 의연함이 있었다.

그래도 각자 개인정리를 하고, 건강원도 정리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시는 얼굴에는 소풍 전날 밤 짐을 싸는 아이 같은 설레임이 엿보인다.

오로지 내 나라의 온전한 하나됨을 믿었기에 가족과 고향을 떠날 수 있었고, 수십년의 혹독한 감옥생활에서도 그 믿음을 이어온 분들에게 가족과 고향은 '혈육의 정'이기에 앞서, 끊어질 듯한 역사를 이어낸 감격이며, 복받치는 설움이고, 한 생을 다 바쳐 얻은 인간성의 승리인 것일 테지만, 삭이고 묻어 둔 부모형제, 자식을 그리는 마음이 어찌 그보다 못하다 할 수 있을까.

태어난 지 3주밖에 안된 둘째를 안고 찾았을 때, 애 키우는 힘겨움을 하소연하던 아내에게 "역사의 주인을 키우는 일이라 생각하라"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수박을 껍질의 하얀 부분만 남기는 것도 모자라, 껍질 두께가 반이 되도록 긁어 드시던 모습이며, 몸조리하는 애엄마에게 갖다주라며 정성 들여 키우신 상추를 손수 뽑아 비닐 봉지 가득 담아주시던 모습,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에게 '아저씨가 해줄게'하시며 차마 세월의 강제집행을 인정하시지 못하던 모습들이 새삼 가슴에 맺힌다.

이북에 가실 때 복길이와 새끼들을 어쩌실 것인지 물었더니, 데리고 가시겠단다.
"나고 자란 고향을 버리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개는 나고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라 주인이 고향이지."

그동안 새끼들 젖을 먹이느라 탈진한 복길이는 어제 동물병원에 다녀왔단다. 제 주인을 닮았기 때문일까? 새끼들의 배설물을 모두 받아먹으며,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새끼들에게 젖을 물렸기 때문이란다.

어미를 대신해서 손가락에 미음을 묻혀 새끼들에게 빨리고 있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따뜻한 손길이 가슴에 전해지는 것 같다.

‘인연을 맺은 지 몇 달 안되어 헤어지게 되었지만, 머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고향에서도 혈압약 꾸준히 드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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