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 나이 열 일곱에 시집와 남편 열 아홉에 보내고 온갖 고생 다 하고 살았지. 그나마 이제라도 억울하게 죽은 내 남편 원혼이나 달래준다니 고마울 뿐이야."

지난 23일 오전 10시 경산코발트폐광산(경산시 평산동 소재) 입구. 이 곳 깊은 갱도 곳곳엔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사건과 부역혐의로 학살된 양민들의 유골이 아직도 썩지 않고 뒹굴고 있다.

오늘은 학살 양민들의 유족이 유골이 '산무덤'을 이루고 있는 이 곳을 찾았다. 이 날은 지난 1960년 첫 위령제가 있은 이후 40여 년만에 「경산지역 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다시 열리는 날이다.

슬픈 민족의 역사를 알기라도 하는 듯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천을 떠돌고 있을 피학살 양민의 원혼과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에를 진 채 유족들이 흘렸을 피눈물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이날 위령제에는 유족 40여명과 관련단체, 전국각지에서 '학살지'를 찾은 순례단 등 모두 200여명이 참석해 가신 님들의 원혼을 달랬다.

특히 지난 18일부터 전국각지 학살지를 순례하며 조사활동을 펴고 있는 『전민특위』(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국제조사단'이 참석해 양민학살의 아픔과 현실을직접 체험했다.

제단 위에 올려진 촛불이 밝혀지고 『경산지역 학살양민 유족회』(이하 유족회) 유윤암 회장이 '초헌'을 알리는 참배로 위령제는 시작됐다. 위령제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숙연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유족들의 통곡과 한탄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유족들은 전쟁당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지난 세월 하루도 쉬지 않고 가슴속에 눈물을 흘려왔다. 이제는 흘릴 눈물 마저 말라 버렸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들이 살아왔던 50년의 고통은 깊었다.

"한 일? 한 일이라고 할 게 있나. 남편이 「보도연맹」도장 한번 잘못 찍어준 죄로 어디론가 끌려갔지. 남은 시어른들 모시고 딸 하나 키우면서 무지 고생했어. 말도 못하지. 공장도 다녀보고... 옛날 공장은 요즘처럼 좋지도 않아. 밤새도록 일하고 또 일하고 했지. 슬퍼하고 할 새도 없었지. 먹고사는 게 더 바쁜데..."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여윈 새색시는 벌써 일흔의 노인이 되었다.

"남편 생각? 바쁘게만 살아왔는데 기억날게 있나. 억울하게 죽었지. 억울하게. 그래도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살았으니 억울한 누명 밝힐 길도 없고......"

학살은 당시 코발트광산에 끌려왔던 양민들에게만 머물지는 않았다. 희생자의 아내에게 아들에게 손자에게까지 대물림돼 왔다. 학살은 계속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이천년대를 살아가는 유족들에겐 여전한 '학살만행'으로 계속되고 있다.

'유족회' 유 회장은 '멈추지 않는' 학살을 추모사를 통해 설명했다.
"남북정상이 만나고 이산가족이 만나는 오늘에조차 우리 유족들은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60년 당시 첫 위령제에 모인 400여명의 유족은 이제 10분의 1만이 이 자리에 다시 모였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유족들이 겪어온 고통의 세월은 '왜 당신의 아버지, 남편, 형제가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기나긴 50년 동안 우리 유족들은 부모·형제·자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또 무슨 죄목으로 죽였는지, 언제 어디서 죽였는지조차 모르고 통한의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경북 오마이뉴스(dg.ohmynews.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