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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곳 광산에서 희생된 양민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집에 농사짓기 위해 만들어놓은 사다리가 경찰서 전화선을 끊는데 사용됐다는 혐의로 학살된 스물 여덟의 농사꾼,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당시 밤에 밀려온 인민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학살된 이, 아직 이유조차 확인되지 않고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열 일곱 여고생의 죽음까지...

"내 아부지는 조그마한 동네 반장일 보셨지. 밤에는 인민군이 동네에 내려와 밥 해돌라 하제. 그카니깐 낮에 밀려온 국방군이 밥해줬다고 빨갱이 아니냐고 잡아가 부렸지"

겨울날 새벽,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잡혀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전씨 할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이어서 설명했다.

"아부지가 끌려가던 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그때 내 나이가 일곱이고 내 동생 나이가 다섯 살이지 아마. 그래도 아직 기억은 생생해. 끌려가시고 할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형무소 면회 갔던 기억도 있고. 근데 얼마 후 사람이 없어졌어. 물어 물어보니깐 여기로(광산)끌려갔다 카더라고. 그 다음부터 영영 찾지 못 한 거지"

대부분의 유족들은 군·경에 끌려간 후 수소문 끝에 찾아낸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을 전해듣고 희생자들의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우리 어머니가 세상 버리고 나서 위패하나 모셔놓고 어머니하고 같이 모셔드렸지. 초혼장이라고 있지 않나? 그거해서 모셔놨지. 그 밖에 더 할 일이나 있나"

작년 말 「보도연맹」사건 관련 비밀문서가 공개된 후 전쟁직후 '자행된' 양민학살이 여론화 되기 시작하면서 학살 배후에 있는 미국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산코발트학살」역시 전국적으로 미군의 암묵적 동의하에 진행된 '대학살'의 연속선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이날 미국에서 '위령제'를 찾아온 『전민특위』 '국제조사단'은 '학살배후 미국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이날 참배 후 가진 대표연설에서 국제조사단 베르따 쥬베르뜨-쎄시(Berta oubert-Ceci)는 분노를 참지 못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유족 여러분이 겪은 아픔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미국의 한 시민으로서 지난 6일동안 전국 학살지를 조사하면서 말로 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를 경험했습니다. (중략) 미국으로 돌아가 이 죽음의 원통함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미국정부로 하여금 진심으로 사죄하고, 정신적 물질적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라고 조사를 전했다. (아래 연설 요지)

추모사가 이어지고 '위령제'는 씻김굿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50년의 한 많은 세월을 달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마음속 상처까지 아물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세상의 관심과 위로가 그나마 용기를 주고 있었다.

"다행이지. 다들 죽기 전에 이런 위령제도 열게되고. 단체에서 도와주고 고맙게 생각해. 지금이나마 조금 한이 풀리기도 하고"
"이렇게 많이 관심들 가져줄지 알았나. 멀리 미국에서도 와서 저렇게 위로해주니. 이제 용기가 나기도 하네"

이날 행사를 계기로 많은 유족들이 자리를 했다. 현재 유족회원은 50여명 정도. 사람들은 오늘 처음 찾은 유족들을 셈하면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이날 행사를 준비했던 『경산시민모임』관계자도 유족들 수에 놀라워했다. 이제 첫걸음을 내딛어 다음해 더 많은 유족들이 참석하는 위령제를 열 것이다. 그날엔 학살의 진상규명도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제단 앞에 피운 향내가 코끝을 자극해 온다. 억울한 원혼들은 오늘 저 깊숙한 갱도 속에서도 이 향내를 맡을 수 있을까. 계속되는 학살이 언제나 멈춰져 원혼은 진한 향내에 잠을 깨고, 유족은 목놓아 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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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2시 국민대회를 마지막으로 『전민특위』'국제조사단'(이하 조사단)은 지난 16일 입국해 8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내용은 조사단이 8일 동안 학살 지역 조사결과를 정리한 내용으로 베르따 쥬베르뜨-쎄시 씨가 '위령제'에서 연설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은 아픈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미국의 한 시민으로서 조사결과는 말로 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통함과 분노는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 아주 무자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정부가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알리지 않고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 사람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학살엔 수 천억 달러가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워싱턴에 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끔찍한 학살 만행을 당한 사람이 진정 내 가족이라면...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여러분 앞에서 진상조사단은 (미국의 한 시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아픔을 가지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감히 바란다면 여러분에게 행하는 이 사죄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조사기간 동안 조사단으로 활동하면서 저희들은 수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내고 그들을 조직해 미국정부로 하여금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도록 싸울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여러분 앞에서 흘렸던 눈물은 거짓 눈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혼신을 다해 미국정부가 사죄하고 물질적·정신적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싸우겠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저지르는 주한미군이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투쟁입니다. 그래서 이 땅이 자유로워지고 여러분이 평화롭고 복되게 살 수 있는 날이 조속히 이루어지기 위해 연대해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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