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옥소대 가는 길

"가자, 부용아."
햇볕 들기 전에 차밭에 나가 김을 메고 들어왔습니다. 집 안 팎 청소를 마치고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린 뒤 옥소대로 향합니다.

"강부용, 얼른 일어나. 산에 가자" 산에 가잔 소리에 토지 밑에서 졸고 있던 부용이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앞장섭니다.

봉순이는 부용이만 데리고 가는 것이 못마땅한지 엎드려 있다 불쑥 일어서 부용이를 가로막고 눈꼬리에 힘을 줍니다. 그렇잖아도 고약스러운 봉순이 인상이 더 험악해집니다.

부용이는 귀를 내리고 꼬리를 살살 흔들며 복종의 표시로 납작 엎드리다 아예 뒤집어집니다. 봉순이는 부용이에게 힘줬던 눈을 풀고 안타깝게 나를 올려다보며 다리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나는 매정하게 뿌리치고, 그 사이 부용이는 재빠르게 달아나 저만치
앞서 갑니다. 세연정으로 난 숲길 양켠으로 시들어가는 장딸기와 뱀딸기들이 드문드문 눈에 띕니다. 이제 땃딸기라고도 부르는 장딸기 철이 가고 복분자와 참딸기, 곰딸기, 멍석딸기들이 노랗고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이 길가에는 누가 부러 심은 것처럼 산딸기밭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산과 들에 가장 흔하고 도시 근교 할머니들이 산딸기라고 내다 파는 딸기도 대부분 이 장딸긴데 올해는 나도 제법 따다 동이 가득 술을 담가 뒀지요. 하지만 한방이나 민간 의학에서 약효가 있다고 약술을 담는 산딸기는 이제부터 익어가는 복분자 딸기와 멍석 딸기들입니다.

특히 검붉은 빛깔의 복분자 딸기는 강장, 강정과 소갈증에 특효가 있다하여 농가에서 밭에다 재배하기도 하는데, 복분자(覆盆子)라는 이름도 이 딸기를 먹으면 동이나 쟁반을 뒤엎을 정도로 힘이 좋아졌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노인네들이 우스개 소리로 복분자 술 먹은 날 밤에 요강을 깨드렸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을 종종 들은 적 있지요.

"부용아, 그쪽 아니고 옥소대."
앞서가던 부용이가 굴뚝다리를 건너 세연정 방향으로 들어서려 하자 나는 부용이를 불러 산길 쪽으로 앞세웁니다.

부용이는 멈칫하다 되돌아와 옥소대 쪽으로 달려 갑니다.
세연지 앞에서 내가 머뭇거리자 부용이도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봅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세연정 부근은 관광객들과 자동차 소리로 분주합니다.

삶은 옥수수와, 솔술, 표고버섯, 쑥버무리 등속을 팔러 나온 동네 할머니들도 벌써 좌판을 벌렸습니다. 관광객들을 유혹할 만한 별다른 특산물이 없는데도 작년과 다르게 올들어서는 세연정 입구에 앉아 무언가를 내다 파는 할머니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습니다.

부황리에서는 나지 않는 미역이며 김 등을 바닷가 마을에서 사다가 되파는 할머니도 생겼습니다. 목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는 소리도 가끔씩 들려옵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부용리와 부황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렇다 할 벌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 짓는 틈틈이 취로사업을 나가거나 품팔이를 하지만 요사이는 그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농작물 수입이 농가 살림에 별다른 보탬이 못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거리 조차되지 못한지 오래지요. 작년 가을 고구마 매상을 보며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시 소비자들이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고구마를 사려면 1킬로에도 몇천원은 줘야 하는데, 농협에서 수매하는 고구마 30킬로짜리 한푸대 값이 6천원에 불과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이곳 부황리에는 자식들은 다들 도시로 나가 돌아오지 않고, 할아버지들마저 험한 술 때문에 먼저 저승으로 건너간 뒤, 혼자 남은 생을 견디는 할머니들이 유독 많습니다.

자식들이 생활비라도 붙여주는 노인들이야 아쉬울 게 없겠지만 대다수는 스스로 농사지어 생활을 꾸려야 하는 처지다 보니, 천원, 이천원의 현금이 아쉬운 할머니들에게 세연정 입구에서의 하루 팔구천원 많게는 이만원 남짓한 벌이가 결코 적은 소득이라 할 수 없지요.

작년 봄 산길을 낸다고 너무 많은 나무들을 잘라내 휑하던 옥소대 길목도 한해가 지나자 다시 잔가지들이 자라나 제법 무성해졌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오르면 불과 1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 평이한 산길이지만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평지에 있는 세연정만 편한 걸음으로 한바퀴 휙 둘러보고 '달랑 정자 하나뿐이네' 불평하며 무얼 보겠다는 것인지 다른 볼거리를 찾아 차를 타고 황급히 떠납니다.

옥소대에 오르자 세연정과 적자산맥의 품안에 자리잡은 보길도의 내륙, 부용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옥소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광대한 바다가 주는 장쾌한 맛은 없습니다. 하지만 노화도와 장재섬으로 둘러쌓여, 마치 호수와도 같은 황원포 앞바다의 편안함은 달리 어디 비할 데가 없지요.

멀리 해남 땅끝 사자산 봉우리를 건너다 보며 나는 넓은 바위에 드러눕습니다. 그새 부용이는 또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녀석은 꼭 여기까지만 동행이 되어 줍니다.

그 다음은 산속을 헤매고 다니다 내려갈 때쯤 되어 나타납니다. 부용동이란 이름처럼 이곳에서 바라보면 적자산 줄기가 미산을 둘러싼 풍경이 갓 피어난 연꽃 봉우리 모습 그대로입니다. 연 잎 위에서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반짝입니다.

잠시 연꽃 봉우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왼쪽 꽃받침쯤 되는 산이 광대봉이고 그 산아래 마을이 내 어린 날들을 묻었던 돈방골입니다. 돈방이란 동백의 방언인데, 저 돈방의 골짜기엔 수천 수만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몇백년을 말없는 가운데 고요히 서 있습니다.

하지만 저기 저 내려다 뵈는 우대미, 팽나무골, 텃골, 천둥골, 응달짝, 보길 초등학교, 세연정, 세연지, 어느 한 곳도 예전의 모습은 희미하고 아스라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내 그리운 돈방골, 내 그리운 옛 집은 아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폐허의 집터만이 꿈결인 듯 아른거립니다. 아, 저 헛간, 저 뒷마당은, 왕곰이라 불리던 내 조부, 내 그리운 왕곰이 장작 패고 작두질하던 곳입니다.

저승의 어디 쯤에선가 왕곰도 이승을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나는 문득 아득히 사라져 버린 옛마을이 그립고도 서러워집니다.

저 푸르고 푸른 하늘은 옛날 그 하늘 그대로인데 산 아래 마을과 집과 사람들만, 본 모습을 잃고, 늙고, 병들고, 무정하게 흘러 가는구나.

빵빵.
관광버스 경적 소리에 적막함이 날아가 버린 것이 기분 상해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바위에서 일어납니다. 그새 부용이가 돌아와 목이 탄지 바위 틈에 고인 물을 허겁지겁 마시고 있습니다.

옥소대는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건축하거나 이름지었던 25개의 정자 정대 중 하나로 동천석실과는 달리 인공을 가미하지 않고 자연 암석 그대로인 채 이름만 붙인 곳입다.

고산은 세연정에 앉아 기녀와 무희들에게 채색옷을 입혀 이 옥소대로 올려보내 춤을 추게 하고 악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세연지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세연지 물이 마르고 옥소대 아래로 숲이 무성한 지금으로서는 쉽게 짐작되지 않는 풍경입니다.

"부용아 가자", 부용이는 앞서 쪼르라니 달려 내려가 나를 기다리고, 내가 가까이 가면 다시 또 달려내려 가고, 이내 굴뚝다리를 지나 동천다려로 뛰어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빨래가 다 되어 있습니다. 옷가지들을 널어 말리고 나는 또 텃밭으로 향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