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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흐..... 흐..... ", '흐'하는 소리는 시간이 지나자 콧소리가 섞인 '크'소리로 변해 나왔다.
"크..... 크..... " 이러다가 이제는 침이 아니라 가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익숙해지니,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정신집중을 하고 기 수련을 해야하는데, 왜 이렇게 딴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무거워서 실눈을 뜨고 보니 내가 거의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들어올리니, 내 앞에 옥수수를 함께 먹었던 박성진 씨가 부처님같이 앉아서 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또 한참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조금 졸은 것 같기도 하고, 숨을 코로 내쉰 것도 같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어림잡아 15분은 확실히 넘은 것 같았다. 성 원장이 나를 멈추었다.

"자, 이제 기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팔을 들고 손을 내 쪽을 향해서, 눈감고, 자, 이제 기를 느껴봅니다."
무언가 찌릿한 게 잠깐 느껴지는 것 같더니, 무거운 공기가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쫙 편 손이 뒤로, 옆으로 밀리는 것 같더니,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한순간을 가지고 기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손과 팔이 어떤 것에도 직접 닿지 않고 밑으로 내려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혹시 하는 분들을 위해서)내가 안 내렸다...

가장 궁금한 것은 '혹시 나도 빙의가 된 게 아닐까?'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말란다. 여자치고 氣가 센 게 이런데서 빛을 발하는 것일까? 귀신도 안 붙고 말이다.

퇴근을 한 직장인들이 하나 둘 수련원에 찾아와 기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성 원장은 기 수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수련법은 기도(氣導)라고 해요. 즉, 기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는 말이지요. 나의 수련법에 거창하거나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기도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나의 수련법에는 복잡한 절차나 단계가 없기 때문이죠.
이 우주와 지구의 모든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힘, 그 거대한 에너지의 진동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 수련이고, 우주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가 공명(共鳴)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맞추기만 하면 되는데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겠어요? 그러므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란 우주의 에너지와 각자 에너지의 파장을 맞추도록 이끄는 것뿐이지요.

나의 수련법에는 복잡한 이론, 혹은 머리를 싸매야 하는 형식이나 겉치레가 없어요. 또한, 나는 완전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일정한 경지까지 가 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직 계속 가야 할 길이 있어요. 다만 그 길을 조금 먼저 지나온 사람으로서 좀더 쉬운 방법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지 이 길의 끝이 어떤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러니 엄밀히 말한다면, 기 수련을 위해 나를 찾아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련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성 원장의 요즘 소원은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어서 더 좋은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자,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온다. 성 원장뿐 아니라 나까지 전화를 붙들고 수련원 위치를 설명해준다. 성 원장은 돈이 없어서 전세로 살다보니,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녀서, 매번 수련원 위치를 묻는 전화가 많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이곳 논현동으로 이사온 지도 딱 한 달되었다고 한다.

5시 20분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스님 한 분이 수련원을 못 찾겠다며 전화가 왔다. 성 원장을 비롯해 기 수련을 하시던 할머니 한 분까지 스님을 찾아 밖으로 나갔는데, 전화가 또 왔다. 엇갈렸나보다. 결국엔 전화를 받은 내가 나갔다. 골목 끝에서 기다리니, 단아한 모습의 비구니스님 한 분이 우산도 없이 내게 다가왔다. 스님을 수련원 안으로 모셨다.

급하셨나보다. 스님은 승복을 벗었다. 더운 여름에도 몇 겹을 입고 계셔서 그런지 안에도 또 승복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얌전하신 스님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예쁜 스님이셨다. 그 분이 말문을 열었다.

"성 원장님의 책을 읽어보고 한 번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빙의('憑依)된 사람과 대화를 하신다고 하셔서, 내가 모르는 존재들을 알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그들이 있다는 걸 믿습니다. 주지스님들이 사주학적으로 풀면 제가 기가 약한 탓도 있다고 하시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인 것 같기도 하고, 외삼촌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스님은 두 남자의 혼이 저를 쫓아다닌다고 하시던데, 빙의, 이런 만남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약간 겁이 난 듯 했다. 성 원장은 그런 스님을 안심시킨다.
"수련원에 회원으로 등록하신 스님들이 많습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와보세요."

나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 원장은 스님에게 편안하게 앉아서, 호흡을 깊게 하라고 말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나는 보았다. 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졸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스님은 굉장히 괴로워했다. 하품을 하듯 입을 크게 벌리고 고통스런 소리를 내면서 온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가슴과 머리를 자학하면서 괴로워했다. 성 원장은 "더 깊게, 더 깊게, 탁한 기운을 입으로 쏟아내야지, 소리나면 참지 말고 내버려.."라고 말하더니,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고생 많았구나. 그렇지, 너를 드러내고 싶었는데, 한번도 못해서 힘들었구나"라며 달래듯 위로했다. 그러자 갑자기 스님은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란 것은 얌전히 이야기하던 좀 전의 스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나 억울하게 흐느끼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 몇 살이니? 너 언제부터 스님한테 있었어? 너 남자야, 여자야?"
몇 번을 모른다고, 모른다고 말하던 스님이, 갑자기 성 원장에게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장장 3시간에 걸쳐 6살 아이의 어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난 여섯 살이고, 전쟁터야, 탱크가 보여, 철모를 쓴 군인아저씨가 스쳐 지나가."
"과자를 먹고 있어." / "과자 맛있어?" / "아니,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냥 먹고 있어." /
"너 6.25 때 죽었구나. 엄마 아빠, 어디서 잃어버렸어?" / "몰라, 나 혼자야.." / "너 계집아이구나?" / "몰라, 머리가 짧아, 몰라."....

스님은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끝이 없어 보였다. 나는 두려웠다. 처음에는 빙의된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서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벽 뒤에 숨어서 듣고 적었다. 6 살짜리 귀신이 억울해 우는 모습에는 나도 약간은 마음이 열려 귀신이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에는 스님 옆에 앉아서 스님인지, 아이인지가 쏟아내는 말들을 수첩에 담아갔다.

이야기는 귀신이야기에서 스님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6 살짜리 귀신은 '귀신이 본 스님'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스님의 아픈 과거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참을 수 없도록 끔찍했던 강간의 이야기까지...

이야기를 거기까지 듣다가,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가지고 수련원을 나왔다. 저녁식사도 놓친 어두운 밤, 내가 성 원장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온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루로 본 수련원'이라지만, 하루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내 앞에 펼쳐져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신비인지 선을 나눌 수가 없었고, 빙의된 스님이 찾아왔을 때는, (기자로서)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기사가 되겠다고 기뻐했던 내가, 스님의 아픈 과거를 흥미만을 위해 듣고 앉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를 끝마친 스님이 내가 아직 곁에 남아있음에,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 할까봐, 나는 자리를 피했다. 아직 나에게는 기 수련보다 인격 수련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기(氣)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신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귀신의 존재를 100%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나 스스로 증명해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련원에서의 하루는 기를 체험할 수 있어서 새로운 만큼, 세상에는 몸도 마음도 아픈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있는 영혼이든, 죽어서 떠도는 영혼이든,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따라가기는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닌 것 같다. 세상 모든 것들에 의미가 부여된다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부여되었으면 한다. 억울한 일도, 슬픈 일도 없이, 현재는 행복하고, 과거는 한스럽지 않으며, 미래에 떠돌아다니지 않게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그 중심에서 기(氣)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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