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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섬 소안도
떠난다 떠나 간다 나는 가노라
세월의 꽃동무를 남겨 두고서
쌍죽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때분을 못이겨서 나는 가노라
만남도 뜻 있으니 믿음도 큰데
마음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이별로 애를 끊는 이 웬일인가
눈물이 앞을 가려 말 못하겠네
(이시완 작사 작곡 '이별가'중에서)
일제하 '때분을 못이겨' 식민지 조국을 등지고 떠났던 이가 어디 이시완뿐이었겠습니까. 남해의 외딴 섬 소안도를 떠나 이시완은 폭풍우에 몸을 맡겼을 것입니다.
1923년 조선노농대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이시완은 송내호 등이 세운 소안학교 교사로 일하다 '마음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다시 소안도를 떠나야 했으며 그 슬픈 정을 이별가로 대신했었지요.
이시완처럼 식민지 조선의 많은 청년들이 조국해방을 그리며 만주로 상해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끝내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요.
소수가 살아 돌아왔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한 미제국주의와 친일 잔당들의 압제로부터 완전한 조국의 해방을 꿈꾸다 그들 대부분이 장렬히 산화해 갔습니다. 살아 남은 자들은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일제에서 미제로 이어지는 지난한 조국 해방운동의 중심부에 남해의 변방 소안도가 자리잡고 있었지요.
1920년대 6천여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던 해방의 섬 소안도.
소안도 해방 투쟁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 운동 기념탑이 세워짐으로서 비로소 복권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복권에 불과했습니다.
날이 흐립니다. 당사도를 지나온 먹구름이 구도 위로 몰려갑니다.
구름은 또 횡간도 사자산 봉우리 사자 머리 위에서 잠시 호흡을 고릅니다.
태풍이 온다더니 아직껏 바다는 잠잠합니다. 뭍이 된 완도 본섬으로부터 불과 30분 거리의 호수와도 같이 평화로운 바다지만 큰 풍랑 몰아치면 이 바다는 더 이상 바다가 아닙니다.
먹이를 주고 안식을 주던 바다는 죽음을 부르는 지옥불 속의 용광로처럼 들끓어 오릅니다. 태풍전야의 고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여객선은 소안항에 정박합니다.
'소안의 뭉게뭉게 피는 꽃송이.....', 여행자는 이시완의 이별가 한 소절을 읊조리며 여객선에서 몸을 부립니다.
부두 들머리에서 기다리던 버스가 여행자를 싣고 비자리 독립운동기념탑으로 향합니다. 열린 차창 사이로 간간히 빗방울이 들이치는 듯 싶더니 이내 또 햇볕이 납니다. 섬 날씨란 게 이렇게 변덕스럽습니다.
건너 섬 보길도의 백도리와 노화도의 천구리가 손에 잡힐 듯 지척입니다. 소안도 역시 인근 보길도나 노화도처럼 임진왜란의 와중에 전란을 피해 들어온 피난민들로부터 근세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지요.
여느 섬처럼 그들 중에는 당대의 체제에 저항하다 숨어 들어온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선지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 혁명전쟁으로까지 올라갑니다.
갑오년, 동학접주 나성대와 혁명군들이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 훈련을 받을 때 소안도 주민들은 성심껏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고, 혁명의 실패 후 주도적인 몇몇 주민들은 관군에 의해 주살당했습니다.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 인물이었던 송내호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이었던 정남국 등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회원 700명의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을 근간으로 소안도는 북쪽의 원산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가장 치열했던 항일 해방 운동 전초 기지였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인구 6000의 섬에서 700여명의 노동자, 농민들이 열성적으로 항일 투쟁을 위해 진군하는 모습을. 항일의 열기로 폭염의 여름보다 더 뜨거웠을 소안도의 산과 바다와 들판을.
소안도 민중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에 맞서 13년 동안이나 계속된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안에 거주하는 일제의 경찰에게 소안면민 모두가 말을 하지 않는 '불언 동맹'으로 일제의 폭압에 저항하였고, 1924년의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었지요.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마을 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잠잤다고 하니 그 진한 동지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따름입니다.
소안도가 이처럼 강고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화학원이 있었습니다.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된 사립 중화학원은, 토지소유권 반환소송 승소 후에 소안 면민들의 성금을 기반으로 사립 소안 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항일 해방운동가들을 길러냈습니다.
당시 소안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보길,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하고도 남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묵과하지 않았지요. 소안학교는 27년 일제의 사립학교 설치령에 따라 강제 폐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검고 흰 돌들로 쌓아 올려진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위로 먹구름이 지나갑니다. 본 이름을 찾지 못하고 다만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라고만 불리우는 돌탑.
그 인간해방의 피어린 투쟁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돌탑이 온전히 복권될 날은 언제일까요. 정말 태풍이 오는 걸까. 빗방울이 점차 굵어집니다.
여행자는 바람이 불어도 섬을 빠져 나갈 생각을 않습니다.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섬으로 그동안 얼마나 모질고 큰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 갔는지요.
사람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 산과 바다와 섬들을 보며 절망했던 여행자는 소안도에 와서야 비로소 자연이 사람으로 인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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