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은 어제 아침까지 제법 많은 비가 왔는데 오늘은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가 올 것 같지 않습니다.
세연정에 나가 보니 세연지 연못 가득 물이 차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 보고 1년만에 다시 보는 만수위입니다.
굴뚝다리가 넘쳐 폭포를 이룰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만 비가 더 오면 물이 넘쳐 폭포의 장관을 이룰 것도 같습니다.
이제 다시 고요한 밤이면 세연지 연못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맑은 물소리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밤늦도록 동천다려 뜰안의 정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시면서, 그도 아니면 우두커니 앉아 듣는 개울물 소리란 얼마나 청량한지요.
이미 다른 집 유자나무들은 열매를 맺어 제법 굵어졌는데 올해도 동천다려 뜰앞의 유자나무 두 그루는 약속이나 한듯이 꽃도 피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음식물 찌꺼기며 나뭇잎 썩은 것들, 군불 피우고 난 재 등 온갖 퇴비를 가져다 주었건만, 유자나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어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작년만 해도 그 전 해에 많은 열매를 맺었으니 한해 쉬며 모자란 양분을 보충하는 해거리를 하나 보다 생각 했었지요.
하지만 금년까지 해거리 할 까닭은 없고, 왠일일까요.
넘치는 양분으로 반짝이는 잎과 무성한 가지는 하늘을 찌를 듯한데, 어째서 저 무심한 나무는 꽃 한 송이 피우지 않고 말았을까.
때가 되면 꽃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 인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저 나무들도 인간 세계를 닮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세계에는 때가 되도 꽃피우고 열매 맺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어이 유자나무 자네들 뭐가 불만이지. 지금 시위하나. 왜 꽃을 안피우지.
거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가지치기를 지나치게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불만이지."
유자나무들은 도무지 대답이 없습니다.
"이봐 말 좀 해봐. 왜 말을 못하지." 나무는 나무의 언어로 말하는데 내가 들을 귀가 없어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합니다.
"꽃 안피우면 자네들 베어버릴 거야."
순간 유자나무가 움찔하며 몸을 웅크립니다.
내가 협박을 시작하자 반응하기 시작하는군요.
일전에 동네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해본 소리지요.
유자나무가 잔뜩 겁에 질려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노인이 그러더군요.
과일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거나 지나치게 적게 맺을 때는 큰가지나 밑둥을 톱으로 약간 베어 보게. 이듬해에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것이네.
"그래, 니네들이 열매 맺기 싫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니네들 밑둥을 반쯤 잘라 줘야겠군" 나는 잔인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유자나무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이런, 저 표정 좀봐. 사색이 다 됐군. 그러니 알아서 열매를 맺어야지."
협박을 하고 나는 태연스럽게 정자에 올라가 책을 봅니다.
유자나무는 여전히 잔뜩 숨을 죽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역력합니다.
눈은 책에 붙어 있으나 좀 채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군요.
내가 너무 지나쳤나.
골똘히 생각합니다.
도대체 유자나무에게 꽃을 피워라, 열매를 맺어라 강요할 권한을 누가 나에게 주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불현듯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나는 정자에서 내려와 유자나무 앞으로 다가갑니다.
내 키보다 한참 큰 나무가 무성한 푸른 잎과 당당한 가지를 내뻗어 내 뜨락을 빛내고 있습니다.
"안하네 유자나무들"
나는 정중히 사과합니다.
애당초 과실나무가 아닌 나무들도 정원수라고 뜰에 심고 가꾸면서 어째서 나는 별로 즐기지도 않는 유자열매 몇 개를 그렇게 탐했는지.
뜰 앞의 배롱나무, 느릅나무, 자목련, 석류나무들 잎다진 겨울에도 저렇게 무성한 잎으로 쓸쓸할 뜨락을 푸르디 푸르게 지키던 유자나무들.
눈 앞의 열매 몇개에 눈이 멀어 나는 그 겨울의 소중하고 아름답던 기억을 까맣게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유자나무의 팔목과 손등, 얼굴과 목을 한없이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져 봅니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