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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에 취한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으로 전국이 시끄럽던 99년 여름. 한겨레신문 생활광고란에 재미있는 광고가 실렸다.

"검사들은 폭탄주, 우리들은 질주!"

공연 연출가 김정환이 쓴 이 카피는 99년 8월 마지막 주에 개봉했던 영화 <질주>를 격려하는 광고였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함께 한 동료들이 십시일반 200만원의 광고비를 마련한.

퇴폐와 타락의 일상을 사는 세기말 세 청년의 이야기 <질주>.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찍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이적표현물 제작·배포)로 기소된 이상인(36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99년을 사는 오렌지족과 여성 락커(Rocker)는 '철의 규율'과 '인간적 품성'의 80년대 청년과 어떤 간극을 가지고 있는가. 이상인의 삶의 좇아가 보면 그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양공주와 미군의 싸움? 내겐 일상이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이상인은 미군부대 가까이 살았다. 자기 집엔 세칭 '양공주'들이 세들어 살았고 혼혈아 친구들도 많았다. 초컬릿을 얻어먹으러 미군부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색시들의 근사한 향수 냄새를 매일 접했다.

기지촌이란 늘상 그렇듯 싸움이 잦았다. 싸움이라기보단 미군이 여자를 일방적으로 폭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상인은 말한다. "그때부터 나는 구체적이진 못하지만 반미주의자였다."

누구보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높던 아버지가 집을 서울로 옮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싫든 좋든 커다란 미군의 군화와 양공주의 비명소리는 이상인의 유년을 지배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어린 이상인은 싸움도 잘했다. 그가 얼마나 개구졌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하나.

"중학교 1학년 때 조개탄 난로를 치우고, 나보다 훨씬 큰 놈이랑 한판 했다. 그때 이가 6개나 부러졌다. 그래서 이건 모두 의치다."
그가 입을 벌리고 자신의 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는다.

"교회? 여자 꼬시려고 다녔다"

남강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문학반에 가입해 시도 쓰고 수필도 썼다.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을 폼으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서 연극을 올릴 때면 대본 쓰고, 연출하고, 배우로 출연까지 했다. '그때부터 시나리오 작성과 연출에 관심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대답이 의외다. 그러나 명쾌하다.
"아니, 여자애들 꼬시려고 그랬다".

안치환(가수)과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다. 조용하고 나긋나긋해 뵈는 안치환도 그 시절엔 '터프 가이'. 이상인이 자그마치 500여장의 연서를 보낼 만큼 좋아했던 인근 학교 여고생 혜선(가명)을 찾아가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야, 니가 뭔데 우리 친구 상인이를 무시해?"

그 혜선에게서 99년 10월 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실로 20여 년만에 전화가 왔다. "네 기사 신문에서 봤어. 나한테 막 윽박지르던 치환이는 가수 됐더라..." '예쁘장한 문학소녀'에서 '수다쟁이 아줌마'로 변해있는 혜선과의 만남을 이상인은 거부했다.
"굳이 힘들여 추억을 깰 필요가 있겠나."
그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낭만주의자였다.

이상인은 그 시절 자신의 '날라리 기질'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선생들 눈 피해서 성인영화 보러 다니고, 청계천에 불법해적 레코드들을 사러 다녔다. 이 기질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사일런트 무비'(무성 영화)라는 그룹 사운드 결성까지 이어졌다. 그때 나는 베이스를 쳤고, 김혜수와 안재욱이 주연한 영화 <찜>을 연출한 한지승은 기타를 쳤다."

그랬다. 이상인에게는 영화보다 먼저 음악이 왔다. 락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처럼 '걸 헌터'(Girl Hunter)라는 별명을 얻고 싶었고, '딥 퍼플'(Deep Purple)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에이프릴'(April)의 장중한 사운드를 들으며 황홀해 했다. 그럼 그는 언제 영화와 뜨겁게 조우하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은 내 머리를 때린 '망치'였다"

85년 재수 끝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연극을 했다. 그가 출연한 <한여름밤의 꿈>이 '대가' 오태석의 눈에 띄었다. 신촌의 '신성 소극장'을 대관해 장기 공연에 돌입한다.

"비슷한 시기에 외대(한국외국어대학)에서 칸느 영화제 수상작을 상영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봤다. 그 영화가 내게 준 충격을 뭐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영화가 철학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결국 <한여름밤의 꿈>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동창인 권해효(탤런트)에게 넘어갔고, 그는 그의 말대로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다. 1985년 겨울이었다.

'프랑스 문화원'에 매일 같이 출근도장을 찍었다. 배창호(고래사냥), 곽지균(겨울 나그네), 이정국(편지) 감독 등도 이 시절에 만났다. 각 학교의 열혈 영화청년들은 '영화마당 우리'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울림' '누에' '돌빛' '터' '소나기' 등의 대학 영화동아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시기였다.

2학년 때는 직접 찍은 8mm 단편영화 <탈>로 'MBC 대학 영상 콘테스트'에서 동상을 받는다. 이상인의 고민은 진일보한다. '영화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자'.

구로자와 아키라의 <난(亂)>은 이상인에게 "너무나 완벽해서 무섭다"는 경이로움과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해서는 안되는데..."라는 반성을 함께 준다. 그 상반된 두 느낌은 이상인을 역사의 전면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87년 군복무 중 맞은 '6월 항쟁'. 그는 시민의 승리와 함성에 경도된다. 그 감흥은 아직도 그에게 유효하고, 이상인이 생을 걸고 만들고 싶은 마지막 영화의 소재는 아직도 '6월 항쟁'이다.

88년 말까진 시위 현장과 노동쟁의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민중 속으로'라는 이상인의 슬로건은 '민중 속에서'로 전이된다. 미국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기를 필름에 담아낸 <깡순이>는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복학을 한 89년. 무더웠던 8월의 어느 날 그는 후배에게 황당한 제의를 받는다. "전대기련(전국대학생기자연합) 대표로 평양에 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상 이상인이 도착한 곳은 홍익대 근처 지하실이었고, 그 장소에 모여 있던 전위대(?) 80명은 평양에 가보기는 커녕 파주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연행돼 유치장으로 간다.

이상인과 단 한 사람만이 능수능란한(?) 낚시꾼 위장으로 연행을 피한다. 그 사건이 임수경을 평양으로 보내기 위한 전대협의 '양동작전'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된다.

그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이상인이 한 이야기다.

이상인의 영화를 통한 사회참여는 계속된다. 프락치 이야기를 다룬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는 '한국창작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각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료로 사용된다. 89년 말엔 김응수(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정지우(해피 엔드) 등과 '영화제작소 청년'을 만들고 대표를 맡는다. 그 '영화제작소 청년'이 만든 것이 문제적 작품 <어머니, 당신의 아들>.

"어버이날 부모님과 함께 보려고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들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제작 초기에는 성동경찰서와 교육청에 늘상 불려 다녔다. 안기부의 협박 전화도 수 차례 받았다.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하면서는 그의 표현대로 "봉고차로 전국을 도망 다니며 찍었다". 시위 장면은 학생들이 전경 역할까지 엑스트라를 해줬다. 시위 도중 뺏은 전리품(?)인 방패와 곤봉이 요긴하게 쓰였다. 집에는 형사 5명이 상주했고, 동료들이 등록금을 모아서 모자라는 제작비를 조달했다.

완성된 영화는 91년 5월과 6월에 전국의 대학가에서 순회상영 됐다. 15만 명이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관람했다. 공안당국은 헬기를 동원해 최루가루를 공중 살포하는 등 엄청난 상영방해 공작을 폈다. 그러나 그런 방해에는 아랑곳없이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세칭 말하는 '대박'이 터졌다. 그러나 그 영화적 성공의 희열도 잠시. 이상인은 영화에 등장하는 '분신 장면'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다.

대공수사단은 "김일성 교시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다" "박승희(전남대) 등의 분신을 부추겼다"고 구속 사유를 밝힌다. 그러나, 이상인이 말하는 <어머니, 당시의 아들> 제작 이유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이 땅을 사랑하며 사는 청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어버이날 나의 부모님과 함께 보고 싶었다."

겨우 20대 후반 나이에 이상인은 운동권 문화판에서는 '스타'가, 공안기관에선 '요시찰 인물'이 된다. 기대와 편견은 양쪽 다 이상인을 힘들게 한다. 그 즈음 미국에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본 사람이 제의를 해온다. "미국에서 공부해 볼 생각 없느냐?"

'무기로서의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 그 갈림길에서

93년 5월 뉴욕으로 건너가 시라큐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3년 동안 이상인은 심각하게 고민한다. '과도한 이념과 선전·선동 영화에서 벗어나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없을까?'. 96년 발표한 그의 졸업작품 <낙타 뒤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자신에게 중독된 사람의 자기 매몰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낙타 뒤에서>는 역사와 거대서사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이상인이 찾은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영화다. 이 영화로 그는 '서울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요새 그의 관심은 독립영화에 있다. '스타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 '장르'라는 강박관념으로부터의 독립. 이상인은 말한다.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는 충무로를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다양한 세계관을 지닌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꿈꾼다. 80년대엔 정치 지향의 영화들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고, 그 신념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이젠 다양한 그룹의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영화는 내 생명같은 것"

영화 일반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동자가 빛난다.

"90년대 초반 거대영화자본이 만든 <쥐라기 공원> 이후 사람들은 영화의 예술적 가치는 도외시하고 산업적 가치만을 우선시 한다. 이 와중에 다양성과 실험성이 사장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영화의 실정이다" 잠시 말을 멈춘 이상인이 선언하듯 말한다.
"단언컨대 영화는 상품이 아닌 문화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관행처럼 이어져온 스텝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배우 개런티에도 그는 분통을 터뜨린다.
"대학원을 마친 조감독의 1년 평균수입이 250만원이다. 그런데 여배우 개런티가 5000만원이란 것이 말이 되는가. 미친 짓이다."

<질주>에 대해 물었다.
"90년대 대중사회의 흐름을 읽고 싶었다. 나와 동시대를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스타와 장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 영화제작 원칙도 평가받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 부분 상업적 제작 시스템에 굴복했고... 물론 내 작품이니, 책임도 내게 있다. 6억5천만원의 저예산에도 불구 제작비를 못 건졌으니..."

이상인은 요새 '민족민주열사 추모연대' 사무실에 자주 들른다. 올해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내년에 제작 예정인 <봉우리>(가제)의 사전 취재를 위해서다.

"30대 초반의 여성 사진작가가 사진 전시회에 초대한다는 익명의 E-Mail을 받는다. 그곳에서 사진 뒷 배경에 흐릿하게 나타난 한 남자를 보고 놀란다. 그는 13년 전 군대에서 의문사한 그녀의 학생시절 애인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그 남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게 될 것이다".
그가 직접 밝히는 <봉우리>의 대강 줄거리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현존해 있는 만큼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망각을 일깨워 역사를 규명해야 한다는 당위를 외면할 순 없지 않은가. 또 하나 조심스러운 건 신파조의 후일담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고..."

<봉우리>의 제작을 위해 최근 영화사 '프라우다'도 설립했다. '프라우다'는 단편영화 연출에 재능을 보인 송일곤(소풍), 정윤철(기념 촬영), 김지훈(온실) 등의 작품도 제작 지원할 예정이다. 이상인이 덧붙인다.

"군 의문사에 대한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꼭 연락을 부탁한다".

물었다. "도대체 영화는 당신에게 뭔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즉답한다. "내 생명이다".

이상인은 여전히 <질주> 중이다

그가 용인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첫해인 97년. 한총련에서 활동하는 학생 하나가 이상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교수님, 너무 바빠서 수업엘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적당하게 학점 좀 주세요".
교수 이상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모범적이지 못하면서 무슨 대중운동이냐. 수업을 들어오고 시험을 쳐라. 그러면 학점을 주마".

시험 시간. 이상인은 공공연히 학생들에게 말한다. "컨닝하다 나에게 걸리면 총장에게 함께 가자. 내가 총장에게 말하마. 나를 내쫓든지 이 애를 제적시키라고".

'세상은 천재보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상인의 믿음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영화를 만들 때나 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영화 <질주>에서 "나는 읽은 책의 숫자보다 따먹은 여자의 숫자가 많고, 따먹은 여자의 숫자보다 마셔버린 위스키 병의 숫자가 많다"고 호언하는 오렌지족 승현(김승현 분)의 '우울한 독백'과 '살아남기 위해 꿈을 꾼다'는 가난뱅이 상진(이민우 분)의 '밑 빠진 절망'이 방향만 다를 뿐이지 동량의 것이란 걸 우리는 안다.

또한 우리는 안다. 80년대 이상인이 '세계'와 '역사', '영화'에 대해 고민한 진지함의 무게만큼 그들 또한 진지했음을. 그 진지함의 저변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고, 애착이란 "여기서 멈출 순 없다"는 정직한 성실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상인은 천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제 그러했듯이 오늘도 '영화'를 향해 정직함을 무기로 성실하게 <질주>하는 서른 여섯의 '젊은 총각' 감독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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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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