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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 도착하자 비가 그칩니다.
수십차례 월출산 곁으로 지나 다녔지만 산문 안으로 들어와 보긴 처음입니다.
태풍이 나를 산으로 보냈습니다.
해탈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섭니다.
이 절 또한 신축 공사중인지 어수선하여 어디 한곳 편하게 눈을 둘 데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명부전으로 향합니다.
요사이 절에 오면 나는 대웅전보다 미륵전 보다 산신각 보다 요사채 보다 명부전을 먼저 들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지장 보살을 가운데 모시고 양옆으로 열 곳의 지옥을 다스리는 대왕들이 도열하여 이승의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명부전 한귀퉁이에 저승으로 먼저 건너간 이들의 영정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세상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언제가 만났을 것입니다.
아니면 곧 만나게 되겠지요.
아, 어쩌면 우리는 이미 만나고 있습니다.
지장.
지장보살을 통해 우리는 이미 만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 지장은 스승의 입멸 뒤 중생의 고통이 가장 극심한 지옥으로 가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일체 중생과 함께 고통을 달게 받으며 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지장.
그가 가고자 했던 지옥은 결코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가불은 입멸했고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아 부처가 없는 세상.
중생의 비명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 이승의 어느 한곳 지옥 아닌 곳이 있을까요.
오늘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진 이 아름다운 산사의 지옥,
도갑사 명부전에서 중생들과 함께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지장보살을 만나고, 지장혁명의 조력자들인 여러 지옥의 대왕들을 만납니다.
제1도산지옥의 태산대왕을 만나고 제2확탕지옥의 초강대왕을 만납니다.
제3한빙지옥의 송제대왕을 만나고 제4검수지옥의 오관대왕을 만납니다.
제5발설지옥의 염라대왕을 만나고 제6독사지옥의 변성대왕을 만나고
제7도래지옥의 태산대왕을 만나고 제8거해지옥의 평등대왕을 만납니다.
제9철상지옥의 도시대왕을 만나고 제10흑암지옥의 전륜대왕을 만납니다.
이 낯선 지옥과 낯선 대왕들.
한 지옥을 빠져 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나는 또 다른 지옥문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태풍이 오기는 오려는가.
대웅전 추녀 끝의 풍경이 웁니다.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저 사진 속의 친밀한 얼굴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도갑사 명부전을 나섭니다.
산문 밖으로부터 세찬 빗줄기가 몰아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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