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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곳에, 잘린 머리가 놓여 있다.
머리는 너무나 컸다. 눈, 코, 귀, 입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잘린 머리에는 머리가 없다. 뇌가 없다. 그 안에는 구경꾼들 대여섯명이 머리 안에서 머리 안으로 비춰지는 영상을 아무런 생각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상에는 비가 흐른다.
잘린 머리에는 머리가 없다.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들려오는 호흡소리...

11월 29일부터 12월 18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가나아트갤러리 2층과 지하 1층에서는 민중미술 작가 임옥상 씨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철의 시대·흙의 소리'이다.

2층에는 그의 작품인 매향리의 잘린머리 <흙두, 흙의 시대>가 짙고 거친 호흡소리를 내뿜으며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고, 지하 1층에는 매향리의 파편 <철두, 철의 시대>가 매향리의 고통을 아파하고 있다.

임옥상 씨와 흙과의 관계는 아주 오래도록 사랑해온 연인 사이의 그것과 같다. 흙은 임씨에게 작품활동의 원천을 제공하는 사랑의 샘이다. 그 샘의 물이 온 몸을 흐르듯, 흙의 기운은 임씨와 임씨의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

철. 흙이 그에게 있어 연인과 같다면, 철은 그에게 새로움을 부여한다. 그는 이번 가을, 매향리 상징 조형물인 '자유의 신 in Korea'를 제작하면서 철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야기한다.

나는, 쇠는 그저 흙과는 대척인 관계에 있는 비생명적이고 차갑고 무거우며 무표정하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치부해 왔다. 흙과는 상극인 쇠는 나와도 무관했다. 그러나 매향리 작품을 준비하면서 나는 쇠와 매우 가깝게 되었다. 무엇인가 쇠 속에도 숨겨진 비밀같은 것이 있었다. 쇠는 한편, 난공 불락의 권력이지만 산소 앞에서는 전혀 힘을 못쓰는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였다. 이 허물어짐, 속수무책, 완전한 패퇴.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매개하는 관계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매향리에서 주어졌다고 한다. 특히 <흙두, 흙의 소리>보다는 <철두, 철의 시대>에서 더 가깝게 엿볼 수 있다. <철두>는 매향리에서 직접 수거한 여러 잔해물과 사격 연습용으로 쓰였던 자동차의 철판을 분해하여 엮어서 만든 사람의 머리다.

머리에는 무수히 많이 박혀 있는 총탄구멍을 볼 수 있으며, 철판 위로 쏟아지는 전쟁에 관한 영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피하고 싶게 만든다. <철두>는 나름대로 인위적이지만, 그것의 존재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철두>는 매향리의 시체이며, 육체만 살아있는 인간정신의 시체이며, 평화를 욕망하는 소리없는 외침의 시체이다.

<철두>가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반면, <흙두>는 좀 더 친밀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인간을 아프게 한다. <흙두> 안의 호흡소리는 가파르다. <흙두> 안에서 쏟아지는 영상, 빗물이 떨어지는 그 영상은 인간의 눈물로 형상화되어 내면을 적신다. 호흡소리는 아파하는 신음소리로 전이된다. 눈물과 신음소리, 그것은 매향리의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미술평론가 박신의 씨는 "철이 남성형이라면 흙은 여성형이고, 철이 희생이라면 흙은 헌신이며, 철이 부분이라면 흙은 만물"이라고 했다. 이렇듯 흙과 철은 서로 공생하는 듯 보인다. 전시회를 둘러본 나에게 철은 과거로, 흙은 미래로 나타났다. <철두>는 남의 머리처럼 느껴지고, <흙두>는 나의 머리처럼 느껴진다. <흙두> 안에 들어가 보았기 때문일까?

우리 스스로가 잘라버린 한국, 우리 시대의 잘린 머리를 보고 나선 초저녁의 인사동은 이미 철같이 차고, 흙처럼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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