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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 영도경찰서 청문감사실의 노력으로, 여순 반란사건 당시 순경으로 근무 중에 순직한 고 손용현의 미망인인 남계연 할머니의 한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 편집자 주)
지난 10월 16일 50대의 한 아주머니가 사무실을 기웃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뭐 좀 여쭤봐도 되느냐"고 하였다. 사무실로 안내하여 차를 건네며 청문한 내용에는 비극의 역사 현장에서 희생된 한 경찰관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한스런 삶과 소원이 담겨 있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부친이 경찰관으로 재직하다가 순직했고 모친은 세 딸을 키우며 홀로 한평생을 살아 왔는데 이제 고령이 되어 묘지를 돌 볼 수 없으므로 부친을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보훈청 등 여러 곳을 찾아 다녔으나 너무 오래되어 곤란하다는 답변을 듣고 허탈해 있던 중 누군가 "청문감사실이라는 곳을 찾아 보라"고 하여 반신반의하며 찾아왔다고 했다.
민원을 접수하고 보훈청과 경남경찰청 등 여러 기관의 협조를 받아 50년 전의 순직 기록을 찾고 경력을 확인하여 안장에 필요한 서류를 완비할 수 있었다. 고 손용현은 해방이 되던 1945년 12월 1일 경찰에 입문하여 순경으로 근무하던 중 여순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진압하려 출동했다가 1949년 1월 1일 순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민원인에게 참고자료가 될만한 유품을 찾아보라고 하였더니 며칠 후 빛 바랜 교양부(敎養簿) 한 권을 가지고 왔다. 모친이 남편을 그리며 사진과 함께 고이 간직해 왔다는 것이었다. 교양부에는 1946년 신임경찰 시절 붓과 펜으로 쓴 교양사항이 세로로 가지런히 기록되어 있었다.
1946년 신임 순경 敎養簿 내용
欠勤 防止의 件 (5月 10日 金. 晴)
公務以上, 欠勤以上은 月俸 除. 但 父母 妻子 死亡 時만 可함. 行先 明卽 하지 안 하면 處罰
巡察에 관한 件 (5月 15日 水 晴)
巡察 目的, 巡察 種類, 巡察 區度數, 巡察 方法, 巡察中 規律, 巡察中 主意, 特別히 主意할 音聲, 巡察후 處理
禮式에 관한 件 (5月 20日 月. 晴)
上司한테 欠禮 안 할 것. 規律을 紊亂 안 할 것. 轉居 新任 時 申告할 것, 興場 등에 00하지 안 할 것
交通 訓練에 관한 件 (6月 1日 土)
1. 各 支署에서는 5月 29日부터 交通 訓練을 實施하여 交通 安全을 期한다.
2. 記 通牒에 爲하야 其 支署 區內 交通한 道路에 職員을 配置 諸 車의 運轉手를 敎養시킬 것.
3. 徒步는 左側, 諸 車는 右側. 訓練을 시켜 諸 車의 速力 制限을 徹底히 할 것.
虎列刺의 件 衛生
移轉 經過 - 病狀 潛伏 期는 12時 或 48時. 4日 滿에는 病狀은 4種에 有함
1. 前驅性下 며 則 排便이 심하고 吐하고 하나 腹痛은 심하지 않다.
2. 1日 間 吐사가 24回 以上이며 大便이 쌀뜨물과 같은 色에 水邊이다
3. 假 死期는 體內 水粉이 빠지기 때문에 皮膚의 膽力이 없어지고 體溫은 低下되고 손으로 皮膚를 만지면 그 자리가 사라지지 않고 言語가 不明瞭해 진다. 드디어 假死狀態에 빠질 이때에 生死는 決定됨.
4. 3種을 넘어가면 回復期다. 여기까지 오는 患者는 적다.
刑事 令 中 現行犯
現行犯이라는 것은 犯罪를 實行하거나 又는 犯罪 實行 終期의 時 發覺 되는 것을 謂함. (예컨대 實行 中부터 實行 終了까지가 아니라 終了 後 若干 時間을 經過하여도 其 形跡 歷然할 場合도 包含
密賣淫
公許를 謂치 않고서 女子가 金錢 物件 등의 報酬를 受할 目的으로 任意 不適定 男子와 交接하는 行爲
교양부를 통한 당시 경찰 엿보기
| ▲손용현 순경의 유품으로 발견된 해방직후 경찰의 '교양부' ⓒ 강석인 |
교양 내용 중 "결근의 건(欠勤의 件)"과 "예식의 건(禮式의 件)"에서 결근을 하면 봉급이 깎이고 부모 처자 사망이 아니면 근무를 결할 수 없었으며 상명하복의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순찰의 목적 방법 규율 처리 등의 기록에서 순찰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고 순찰시 특별히 주의할 음성에서 야간 순찰시 소리에 신경을 쓰면서 방범활동을 하도록 구체적인 교육을 시킨 것으로 보아진다.
호열자(콜레라) 증세에 관해 상세히 기술한 점은 부친의 오랜 투병 때문에 병상에 관해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고 호열자 전염병이 유행하여 주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밀매음(密賣淫) 교양 내용에서는 당시에도 윤락을 하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형사 령(刑事 令)의 현행범(現行犯) 설명은 현행 형사소송법과 별 차이가 없다. 단 현행 형사소송법에서 준현행범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약간(若干) 시간(時間)을 경과(經過)하여도 기 형적(其 形跡) 역연(歷然)할 장합(場合)도 포함(包含)" 이라는 대목에 준현행범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외 군정포고령, 형사 령, 경찰법, 책임의 관념 등이 교양 받은 날짜 순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 법령과 군정 포고령을 바탕으로 신임 경찰관 교양을 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경찰권은 정치, 사회와 위생분야에 까지 미쳤고 이런 경찰의 활동으로 정부수립이 가능했다고 보아진다.
빨치산 역사와 손 순경의 죽음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 결정을 둘러싸고 국내의 정치세력은 우익은 반탁, 좌익은 찬탁으로 극렬히 대립하고 있었고 좌우 중도파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은 초기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미군정과 좌익의 전면 대립, 이승만 등의 단독정부 수립운동 등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여운형의 암살로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민족분열 극복에 앞장섰던 안재홍은 하루빨리 통일정부를 만들어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조국에는 다시 중대한 위기가 찾아 올 것이라면서 극좌와 극우로 편향되면 "내란적 항쟁의 피"를 흘릴 가능성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이승만의 반쪽 정부수립을 위한 5 .10선거일이 확정되자 총선 방해를 위한 4. 3 제주 폭동사건이 발생해 7개월이 지나도록 진압이 되지 않는다. 그 해 10월 19일 제주폭동진압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 중대장 김지회와 지창수 상사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반란군은 여수와 순천 일원의 군경과 화약고등을 습격하며 세를 규합해 갔으나 1주일만에 진압되고 만다. 반란을 주도했던 김지회는 진압군에 쫓기게 되자 잔여 부대원을 이끌고 광양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하게 되면서 빨치산의 역사는 시작된다.
1945년 10월 21일 군정청 경무국 설치로 국립경찰이 창설되어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여순 반란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다. 이때 25세의 순경 손용현도 빨치산 토벌대에 차출되어 지리산 자락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그의 처와 젖먹이 세 딸은 한 맺힌 고난의 삶이 시작된다.
미망인의 한 서린 삶
| ▲지리산의 철쭉 전경 ⓒ 강석인 |
"지리산에 철쭉이 피면 슬픔마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고 어느 향토 시인이 말하는 비극의 현장 지리산. 남계연 할머니는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리산 자락 백운암을 찾아 비명에 숨져간 남편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었다.
묘지 개장과 안장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 경남 밀양군 상동면에 홀로 거주하고 있는 남계연 할머니를 찾았다. 골목길 귀퉁이에 단칸방 스레트집과 마당을 합해야 10여 평 남짓했다. 마루 끝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메주 덩어리를 보고 누구 주려고 이렇게 만드느냐고 묻자 해마다 조선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딸들에게 골고루 나눠준다고 했다. 홀로 젖먹이 세 딸을 키운 모정이 여태 변함이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허리를 숙여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서니 경찰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투병하신다고 들었는데 건강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가진 것 없고 아무 생각도 없으니 병도 절로 없어지더라"며 위암과 췌장암을 극복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전사로 확인되어 국립묘지에 안장 승인이 났다고 전해주자 그때서야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길었던 고난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았다.
할머니가 18세 되던 해에 시집을 오니 3살 연하인 남편은 학교를 다녔고 시아버지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었다고 한다. 맏며느리로서 집안일과 시아버지 병 수발로 신혼의 단꿈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고된 시집살이를 전해 주고 있었다.
남편은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경찰 시험을 보러 간다며 집을 나가 몇 개월이 지난 후 제복을 입고 집에 나타났다고 했다. 부산과 밀양 등 근무지 이동이 잦았고 한 달에 집에 오는 날은 손꼽을 정도였는데 그것도 밤늦게 잠깐 들려 새벽에 가곤 했다 한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표를 내고 집에 돌아와 극진한 병간호를 하였는데 결혼생활 중 그 때가 남편과 가장 긴 시간을 보냈고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된다고 하였다.
남편은 시아버지 병세가 호전되고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다시 경찰관에 응시하였다고 한다. 시험 치러 가는 남편을 배웅하던 그 날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 줄 몰랐다며 그때 말리지 못한 게 평생 한이라고 전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5개월 된 막내딸을 안고 설마 하며 함양경찰서에 도착하니 18개의 관이 정렬되어 있었고 남편의 시체를 보는 순간 아기를 떨어뜨리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당시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남편을 잃고 친정을 찾아갔으나 "여자가 한번 출가하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친정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지척에 있는 친정에도 발을 끊었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순간이었으며 한 집안의 맏며느리 역할과 세 딸을 키우느라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말에는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한 서린 시집살이를 보는 듯 했다.
사진과 유품들을 장롱 속 깊이 두고 남편이 옆에 있다고 여기며 한 평생을 살아왔으나 "이제 다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팔순 할머니의 안면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개장시 주의 사항과 안장에 필요한 절차를 꼼꼼히 설명하고 미리 작성해 간 안내문을 전해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와 동승하여 면사무소에 묘지개장 신고필증을 발급하려 가는 길에 이제 금강산이라도 한번 다녀오시라고 권하자 북한이나 빨갱이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며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나오면 아예 TV를 꺼버린다고 했다. "우쨌거나 부부간에 재미있게 사이소"하는 할머니의 인사말에는 50년을 홀로 살아온 한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극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이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고 있지 않나 주변을 둘러보고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 비극의 현장에서 숨져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의 책임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고 손용현 경위는 12월12일 대전국립묘지에 봉안되어 12월 말 안장될 예정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도움을 주신 보훈청, 국립 현충원, 경남. 부산지방 경찰청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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