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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편지를 쓰기 위해 오늘은 특별히 낡은 타자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지금 카나디안 브라스의 <플레이즈 듀크 엘링턴(Plays Duke Ellington)> 앨범 중, 첫번째 곡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의 제목은 이러합니다.

'It don't mean a thing'

사실 제가 당신께 쓰려고 하는 편지도 이 곡의 제목 마냥 '별거 아닌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 역시 묻어두기엔 너무 달콤하고, 꺼내 보기엔 너무 시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을 거라 믿고 이야기를 꾸려 나가 봅니다.

며칠 전, 인사동에 갔었어요. 자주 가는 곳이지만, 항상 설레이는 곳이지요. 특히 도로를 새로 깐 다음에는 항상 새롭게 느껴져요. 불길한 새로움이라고나 할까? 안국동에서 인사동쪽으로 들어오는 길에 퍽 쓸 만한 카페가 있습니다. 인사동 분위기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모던한 곳이지요. 그렇다고 인사동과 안 어울리는 곳이라고 말하기엔 좀 매정한 것도 같고요. 그 카페에 가서 혼자 보졸레 누보의 바알간 빛에 한번 취해 보고 싶었어요. 가끔씩 레드와인에 은근슬쩍 취해 보는 것도 좋지요.

그렇게 와인 두 잔을 마시고 나오니, 세상이 정겹더군요. 술기운을 물리칠 요량으로 이 상점, 저 상점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멋진 그릇들, 예술품들, 때로 그러한 물건들은 감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저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지요. 예술에의 끝없는 무지.. 조금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지한 것이 예술이란 녀석을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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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징가 Z
ⓒ 배을선
몇몇 상점을 지나니, 참으로 특이한 가게, 아니 창고라고 해야 할까요? '토토'라는 가게가 눈앞에 뿌옇게 들어옵니다. 진열장에는 로봇 태권V와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방글방글 웃고있지 않겠어요? 푸하핫, 이 녀석들 좀 보게. 제가 20년 전에 내다 버린 물건들이 모두 모여 있더군요.

우리 그렇게 놀았잖아요. 종이인형 놀이하면서... 10원, 20원 하던 그 종이인형은 20년이 지난 지금 1000원에 팔리고 있더군요. 이젠 가격이 비싼 골동품이 되었나봐요. 당신이 가지고 놀던 종이딱지도 보입니다. 와우, 이 창고같은 곳은 꼭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폴이 어딘가에 숨어 있지는 않나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지만, 폴은 보이지 않고, 우리들 지난 시절의 유물들이 저를 반기더군요.

종이인형과 딱지
▲ 종이인형과 딱지
ⓒ 배을선

요즘 아이들 뭘 갖고 노나요? 월트 디즈니의 인형들, 혹은 워너 브라더스의 캐릭터들? 혹은 일본에서 수입된 크리아트의 예쁜이들? 우리 어린 시절, 그런 게 있었나요? 전 못난이 삼형제나, 혹은 못난이 이형제, 참, 지금에서야 묻는 건데 못난이들은 참 외로웠나봐요. 꼭 둘이나 셋이 함께 모여 있잖아요. 하여튼, 그런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종이인형, 움직이지 않는 마론인형을 거쳐, 어느 날 움직이는 인형을 갖게 되었죠. 그 당시 가격으로 3000원 하던 인형 라라는 제가 가지고 논 최초의 팔, 다리가 움직이는 인형이었죠. 하지만 라라의 인기도 미미가 등장하자 한풀 꺾였습니다. 요즘엔 미미도 찾아보기 힘들죠? 아이들 모두 미국산 팔등신인 바비인형을 원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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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난이 3형제.. 에그, 진짜 못났지만, 정말 정겹구나!
ⓒ 배을선

혹시 당신은 딱지나 구슬치기가 지겨워질 즈음, 문방구에서 100원 하던 조립식 로봇을 사지 않았었나요? 그 안에 들어 있던 본드 생각이 나요. 접착력이 전혀 없던 그 본드가 손에는 왜 그렇게 잘 묻었던지... 아톰과 마징가Z을 좋아하지 않았었나요? 코코블럭을 가지고 놀다가 조금 더 성숙해지면 영플레이모빌을 가지고 놀았죠. 지금 생각 해보면 레고시리즈가 한국에 수입되면서 그 위세에 눌린 영플레이모빌이 과자 안에 하나씩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모으겠다고 열심히 그 과자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좋은 마케팅 방법이었죠? 요즘도 과자와 장난감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가 없죠?

schoolbag
▲ 은하철도999 책가방
ⓒ 배을선
요즘 학생들은 어떤 가방을 가지고 다니나요? JAN SPORTS, EAST PAK, LUCAS... 뭐든지 영어가 써 있지 않으면 안되죠. 한글이 써 있으면 촌스럽다고 좋아하질 않는데요, 글쎄... 씁쓸합니다. 우리가 들고 다녔던 가방 기억나죠? 만화가 그려져있던 가방 말이에요. '은하철도999', 혹은 로봇이 날아가는 그림 등이 가방에 크게 그려진 가방을 우리 모두 들고 다녔죠. 신발은 어땠나요? 캔디나 삐삐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발이 얼마나 유행이었던지, 그 신발을 신겠다고 울기도 많이 울며 어머니를 졸라대었죠.

lunch
▲ 양은 도시락, 아니 벤또!
ⓒ 배을선

참, 우리가 언제부터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죠?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항상 점심을 먹기 전에 집에 왔고요. 2학년 때 도시락을 들고 다닌 것 같아요. 사실, 벤또라는 말이 더 친숙하죠? 양은으로 된 벤또에 밥을 가득 넣어서, 겨울이면 난로에 탑처럼 쌓았었죠. 맨 위에 올려졌던 밥은 따뜻하지도 않았어요. 이젠 그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전 3학년 때부터 보온밥통을 가지고 다녔어요. 색깔도 기억나요. 노란색 보온밥통. 요즘 학교에서는 단체급식을 하니까, 어머니들도 아침마다 편해지고, 아이들도 따뜻한 밥을 먹는답니다.

라디오와 최무룡의 선과악
▲ 그 시절의 라디오와 최무룡의 LP 선과악
ⓒ 배을선

아니, 이게 웬 걸? 제가 뭘 발견했냐고요? 아주 오래된 라디오예요. 세상에, 요즘 애들은 이만한 크기의 스테레오를 가지고 있을 텐데, 엄청 크군요. 이만한 라디오가 있었을 거라는 걸 아마 상상도 못하겠죠? 조그만 워크맨이나, 디스크맨, 아니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은 LP라는 것을 알기라도 할까요? 여기 최무룡 씨의 앨범이 있어요. 사실 저에게도 최무룡 씨의 노래는 어색하게 다가와요. 아무렴, 저에겐 전영록, 조용필 씨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걸요.

fan
▲ 낡은 선풍기 위의 교모
ⓒ 배을선
당신은 교복을 입었었나요? 참 우습지만, 전 초등학교 때부터 교복을 입었어요. 그 초등학교가 그 동네에선 꽤 잘 나가는 사립학교였나 봐요. 교복에 교모,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교문에 서 있던 주번 언니나 오빠들에게 이름을 적혔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각 학교마다 자율적인 교복착용 정책으로 인해서 교복을 입게 되었어요. 하지만 아버지 세대가 입고 다니던 스타일의 교복도 아니고, 교모도 쓰지 않았죠. 여기 아버지가 쓰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교모가 있군요. 아이구, 그 밑에 선풍기도 꽤 낡았군요. 하하하...




shoes
▲ 까만 고무신
ⓒ 배을선
어머, 이거 고무신 아냐? 까만 고무신에는 하얀 때가 앉나요? 고무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아직도 이런 까만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길 바래요.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오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핸드폰이 울렸어요. 제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맞은 편에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바로 이 전화기들이에요. 요즘 아이들은 손으로 누르는 전화기 말고 손가락을 구멍에 넣고 돌려야 걸리는 전화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까요? 뭐 전화기야, 요즘에는 복고 취향의 사람들을 위해 구식 전화기가 나오기도 하니까 그리 낯설지는 않겠죠.

telephone
▲ 돌려야 걸리는 전화기. 누르면 안 걸려요!
ⓒ 배을선
어머머, 내가 이 가게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요. 와인 두 잔의 취기는 이미 절 빠져나갔군요. 실컷 구경만 하고 나와 가게주인에게는 좀 미안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그렇죠?

세상만 변했겠어요? 저도 물론 변했겠지요. 사라져가는 많은 것들, 아니 이미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겠습니다. 왜냐구요? 과거에 대한 특별한 향수로 가슴 속에는 아날로그 모양의 파도가 밀려온다 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머리 속에는 항상 새로운 디지털 모양의 파도를 밀어 넣어야 하니까요.

이제야 제가 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듣고 있는지 당신은 눈치채셨을 겁니다. 'It don't mean a thing' 별거 아니라구요. 그냥 와인 두 잔에 취해 과거의 낭만에 대한 향수가 깊어진 사람의 넋두리쯤으로 받아주세요. 촌스럽다고, 영어가 아니라고, 너무 구식이라고 누군가는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낭만과 추억이 된다는 것을 당신만은 이해해 주시겠죠?

덧붙이는 글 | # 카나디안 브라스(Canadian Brass)는 1970년에 결성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브라스 음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게 했던 대표적인 밴드이지요. 피아노, 베이스, 드럼, 현악, 리드 악기를 배제한 채, 금관악기만으로 클래식한 기교와 엔터테인먼트의 조화를 훌륭하게 표현하여 전세계 많은 이들로부터 살아 있는 금관앙상블의 전설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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