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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20살에 궁예의 수하에 들어가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무장으로 성장, 지략과 용맹으로 수군을 잘 다루어 후백제 공략에 성공하여 제2인자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급기야 그의 덕망과 역량을 신뢰한 무장들은 포악한 궁예를 내치고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918년 6월).
왕건은 고구려 부활의 의미를 담아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안으로는 여러 세력의 모반과 도전을 무력과 포용력을 적절히 사용하여 이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후삼국의 통일에 힘을 쏟았다. 935년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1년 뒤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써 왕건은 즉위한 지 19년, 후삼국이 시작한 지 47년만에 삼국을 하나로 합치는 위업을 달성했다.
왕건은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적당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 덕분에 궁예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귀순한 경쟁자 견훤을 환대했으며 경순왕에 대해서도 예우를 갖추어 환대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반역은 단호하게 대처해 왕권을 강화했다.
왕건은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었고, 북쪽의 국경선을 대동강에서 청천강으로 확대해 신라가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토를 많이 회복했으며, 발해의 유민을 포용했고, 골품제가 낳은 계급적 모순을 극복하여 신라통일의 의미를 넘어서는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훈요십조에서 차현(차령) 이남과 공주강(금강)밖 사람들을 쓰지 말라고 유훈한 것은 민족통합을 해할 빌미를 줄 수 있는 실책이라 볼 수도 있겠다.
877년 신라 헌강왕 3년에 송악의 부호인 융의 아들로 태어나 재위 26년(67세)인 943년 "인생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다"며 천수를 다하기까지 실로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민족사를 길이 장식하고도 남을 위대한 발자취였다.
한결같이 삼한을 규합하여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포부를 키우고 있었으므로 지역감정의 극한적 대립으로 그 폐해가 망국의 지경에 이른 요즈음의 세태와도 흡사하여 소름끼치는 전율감으로 태조 왕건 사극과 소설류에 빠지고, 나아가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몰두하는 등 태조 왕건의 신드롬이 일고 있는가 보다.
이러한 때에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 기행을 해보는 것도 독특한 흥미거리가 될 것이다. 북한과 경기 북부, 그리고 서해안 지역에 많은 왕건의 발자취들이 남아 있으나 지면의 한계상 대구 경북 주요 지역을 일별해 보기로 한다.
1. 문경과 상주지역
2만여 평의 부지에 연건평 2300여 평 규모로 개경궁, 백제궁, 48동의 기와집, 47동의 초가집 등이 들어선 문경새재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에는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200만여 명의 관람객이 모일 정도로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왕건과 관련이 있어 촬영지로 애용되고 있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 1리 경북팔경 중 제일경인 진남교반경 내 고모산성 아래에 있는 토천(兎遷)이 관심의 장소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명 토끼비리로 불리는 이 길은 조선조 영남대로 1000리 중에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이 길을 오르내리는 길손들의 짚신에 닳아 아직도 반질반질 윤이 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벼랑을 깎아 사다리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6-7리나 된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곳에 이르러 길을 찾지 못하던 중에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앞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토끼비리라고 불렀다"고 돼 있다.
최근 영남대로를 답사하고 "일본인의 영남답사기"를 쓴 일본인 유학생 도도로끼 히로시는 그의 이곳 답사기에서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토끼비리를 복원해 역사공원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 바 있어 외국인이 되레 관심을 갖는 역사 속의 길이 됐다.
경상북도와 문경시는 지난해부터 추진중인 유교문화권개발 일환으로 이 일대 고모산성과 진남루 복원과 함께 토천 주변을 정비하고 주막거리를 조성키로 하여 진남교반경 개발을 본격화하려고 하여 급증하는 영남대로 종주 인파와 더불어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드라마에서 왕건과 도선 대사가 도를 닦던 장면의 장소로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백두대간의 비경을 간직한 대야산 용추계곡이 알려지면서 하루에도 수천명이 찾고 있는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문경지방에는 이외에도 927년 신라 경애왕 4년에 왕건이 견훤의 주둔지인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근품성을 쳤고, 그해 8월에는 오늘의 문경인 고사갈이 성주 흥달과 그의 일족 및 무리들이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흥달의 귀순 후에는 왕건이 지금의 문경시 호계와 점촌에 배산성을 수축하고 견훤을 방어케 했다고 한다. 또한 왕건이 견훤을 칠 때에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혜국사에서 주흘산 정상 사이에 있는 어류동에 머물며 성을 쌓고 어류라 하고 거기에 절을 세워 그 이름을 보제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고려가 건국한 918년 신라 경명왕 2년에 견훤의 아버지인 상주 사벌국의 적장 아자개가 고려 왕건에게 항복 귀순하였다 한다.
2. 안동지역
지난 2000년 9월 28일 안동시 성곡동 민속박물관과 민속촌에 인접한 1만2000여 평 규모의 촬영세트장 기공식이 있었고 또 안동시 석동동 안동호변 시유지 2천여 평에 해상 촬영세트장이 건립될 예정으로 고가옥박물관, 조각공원 등 이 일대와 연계해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안동의 지방세력으로 신라인이었던 일명 삼태사라 불리는 권행, 김선평, 장정필은 고려통일의 분수령이 되는 병산전투(930년)에서 왕건을 도와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현지 전설에 의하면 견훤은 지렁이 설화처럼 전세가 불리해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기어 들어가 고려군은 속수무책이었는데 이에 고려의 삼태사는 전략을 세워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풀어 견훤은 배겨낼 수가 없어 패주했다는 것이다.
이때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고려군이 승리한 사실을 청아한 소리로 알렸다 한다. 삼태사 가운데 권행은 과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고려에 귀순하여 치욕을 씻으려 했다고 하며 그 공로로 성씨와 안동지역의 지배권을 하사 받고 김선평과 장정필도 이 지역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한다. 지금도 태사묘 보물각엔 삼태사의 유물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3. 영주지역
지난 2000년 8월 영주 부석사에서 드라마 일부 장면 촬영이 있었는데 궁예가 왕건과 함께 점령지를 순행하면서 고승 허월의 권유로 부석사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궁예가 부석사 법당 안에 걸린 아버지인 신라 47대 경문왕의 초상화를 칼로 내리치는 장면이었다. 부석사 의상대사의 지팡이로 알려진 선비화, 삼석각, 조사당 등이 배경으로 나왔다. 영주지역 문화유적지를 배경으로 자주 촬영할 계획으로 이 지역의 볼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4. 의성지역
도선과 최치원은 같은 시대에 산 예언가로 30년 나이 차이로 비슷한 시기에 의성 고운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간 선각자들이다. 도선은 화강암으로 석가여래좌상(보물 246호)을 쪼아놓았고, 최치원은 의상이 창건하고 이름지은 고운사(高雲寺)를 그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고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려고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다. 도선은 왕건의 태생과 고려건국을 예언하고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주어 국가 다스림에 영향을 주었고, 고운은 왕건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계림 곧 신라는 누런 잎, 개경은 푸른 솔-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일어난다)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경순왕 3년(929년) 7월에 견훤이 의성부의 성을 치니 고려 장군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여 왕이 통곡하면서 "나의 좌우 손을 잃었다"고 하였다. 태조 23년(940년) 3월에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고쳤는데 문소군에서 의성부로 바꾼 일은 이처럼 홍술 장군이 문소성을 의롭게 지키다 전사한 보답의 결과라고도 한다.
고려사 열전에서 임금의 정실을 후비라 하며 의성부인 사람인 태사 삼중대광 유(儒)의 딸로 의성부원대군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건은 혼인관계를 통해 지지기반인 호족들과의 결속력을 다졌고, 의성 사람으로 고려 개국 일등 공신인 홍유의 딸을 26번째 후비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왕건은 61세까지 얻은 부인이 29명, 아들 25명, 딸 9명으로 후대에 큰 후유증을 낳기도 하였다. 홍유는 의성 홍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5. 구미지역
옛 구미지역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역사상 보기 드문 10만 대군이 격돌하여 최후 결전을 치룬 곳으로 태조 왕건(60세)이 후삼국을 통일해(935년 9월) 민족 재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역사적 성지로 유서 깊은 곳이다. 군사를 정비한 후 북을 치며 진군하니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고려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나 후백제 쪽으로 떠갔다고 한다.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왕건이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서 신검을 방어했다고 해서 어갱이들이라 하였고, 송림 괴평리 앞들에 주둔한 신검의 진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정갱이들이라 했으며, 구미시 비산동 뒷들부터 지리산 앞들 사이에서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았다고 해서 발갱이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호박방아 찧어놓은 꽁지 달린 보리밭에/물 말아서 배 채우니 무슨 힘이 있을 손가/원통하다 농사일꾼 한탄한들 소용없네/중략"으로 시작되는 이 발갱이들 노래는 불볕더위, 장맛비로 고달픈 농사일을 하면서 흥얼대는 울부짖음의 소리가 구전으로 몸짓으로 지금까지 전수되어 왔다.
6. 성주지역
고려의 벽진은 지금의 성주인데, 약 60여 호가 모여 사는 홈실마을은 생긴 지 800년이나 된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다. 시조 어른은 지금부터 1100년 전에 고려 태조 때 벽진 장군 이총언이며 시조 이총언을 모시는 경수당엔 이총언이 사용했던 돌로 된 말구유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이 말구유에 씻으면 눈병, 피부병이 말끔히 씻기는 영험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총언은 당시 벽진군의 유력한 지방세력으로 신라계 사람이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가 있기 1년 전 이총언에게 이씨 성과 함께 벽진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본관을 하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려의 세력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이총언은 왕건의 사람이 되어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해 큰공을 세운다.
7. 경주지역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시해된 후(927년)에 그에 의해 경순왕이 왕위에 옹립이 되었지만 난폭한 견훤보다는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어졌다. 931년 왕건은 신라의 경순왕을 알현하고 수십일을 머물면서 그의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치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더니만, 이번에 왕건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경순왕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태조에게 귀순할 때(935년)에 꽃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에 뻗쳐 길은 사람으로 메워졌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경순왕은 정승공에 봉해지고 신라는 경주라 불리었으며 정승공의 식읍으로 되었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아버지가 김억렴이며 신라 경순왕의 질녀인 신혜왕태후 김 씨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훗날의 현종의 아버지로서 안종이 되었다. 왕건은 그의 나이 예순 한 살까지 부인을 맞았는데 출신지도 다양했다. 지역별로 보면 황해도 9명, 경상도 6명, 경기도 4명,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가 각각 3명, 전라도 2명, 나머지 2명은 출신지를 알 수 없다. 고려에 귀부한 경순왕은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고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8. 대구지역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벌이고 있던 중에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와 경애왕을 시해하고 아우인 경순왕을 왕으로 삼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신라는 왕건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왕건은 파군(派軍)하여 돌아가는 후백제군을 대구 근교인 공산에서 맞이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었다. 이때 왕건의 부장인 신숭겸이 왕건과 의관을 서로 바꾸어 입고 왕건을 피신시킨 뒤에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고려군은 대패하였다.
전사한 자리인 팔공산 입구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신숭겸 장군의 비각을 세워 그 공을 기리었으며, 왕건을 지묘동 뒷산에 피신시켜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王山)이라 하였다. 훗날 왕건이 대패한 이곳에 동화사를 중건하였는데, 그 당시 오동나무 꽃이 화려하였다 하여 동화사(桐華寺)라 이름 지었고, 왕건이 견훤과의 전쟁에서 패했다고 하여 파군(破軍)재라 하였으며, 달이 반야이고 중천에 떠서 왕건의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이라 하였다.
태조 왕건이 사지를 피하면서 무태동에 이르러서 군사조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이를 무태(無怠)라 부르게 되었고, 왕건이 혼자 앉아 잠시 머무른 곳이라 해서 봉무동 독좌암(獨座岩)이라 하였으며, 불로동 근처에 오니 나이 많은 어른들은 피난을 가고 아이들만 있다고 하여 불로동(不老洞)이라 부르게 되었고, 해안동에 와서 비로소 안도의 얼굴을 풀었다고 하여 해안동(解顔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심(安心)에 와서 비로소 적군의 추격이 없어 마음이 안심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팔공산 일대에 왕건에서 유래된 지명은 모두 20여 곳에 이른다.
또한 왕건은 대구 앞산에 있는 동굴에서 몇 달 동안 숨어 지내다가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후 이 굴을 왕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지역 일대에서 촬영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고 방송사상 첫 고려시대 사극인 태조 왕건이 인기를 더해가면서 왕건과 관련한 명소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의 관심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구 동구청은 향토문화재 순례 행사를 갖은데 이어, 왕건의 유적지 등을 담은 "내고장 동구를 찾아서" 라는 책자를 제작, 배포했고, 지난 2000년 10월에는 팔공고려문화제전을 열어 공산동수전투를 재현하기도 했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천년 전 그때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유사하여 여전히 지역간 남북간의 통합이 민족적 과제로 남아 있고 나아가 세계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고려의 역사 경험 속에서 오늘을 풀어갈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려를, 또 그 고려를 세운 왕건을 눈여겨보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데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대외무역을 장려하여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방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고려 왕조의 개방적 대외자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중국의 오대십국을 평정한 송의 태조 조광윤과 비유되기도 하는 외유내강형 인물인 왕건의 통합정책은 다양성과 통일성, 역동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원사회로의 길을 열었다. 다원사회는 다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들에 의해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세계관, 즉 다원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추세 속에서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는, 다양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원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진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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