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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3월 19일에 발매된 월간 <말> 4월호에 실린 것으로 오마이뉴스와의 기사협약에 의해 전문을 옮겨 싣습니다.....편집자주)
진 기자에게.
<조선일보> 3월 7일자 9면에 실린 당신의 기사 잘 봤습니다. 「조선일보 사장 열전 ―9대 계초 방응모 선생」이란 제목의 그 '대문짝만한' 기사를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요? 자, 기사를 읽고 난 첫 느낌부터 말해 볼까요. 나는 진 기자님의 그 글이 한국언론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기사가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신문방송학과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당신의 기사를 표본으로 삼아, 언론인이 어디까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지 두고두고 토론하고 연구하게 될 겁니다.
동의하기 어렵다고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그 이유를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해 드리지요. 우선 진 기자님의 기사 중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제시한 뒤 각각의 항목에 대한 내 생각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당신의 기사에 등장하는 지사(志士), 경영 귀재, '인물 송곳론', 혁신호 1백만부 발행 등 일부 내용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친일문제연구가인 <대한매일> 정운현 차장이 <미디어오늘>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1) 계초(방응모)는 일절 편집에 관여하지 않았다. 광복후 계초가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독당 재정부장을 맡고 있을 때 정치부 이규홍 기자가 한독당에 불리한 기사를 가져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계초는 "자네 그걸 몰라서 묻나. 한독당은 내 개인 일이고, <조선일보>와는 상관없어"라고 잘라 말했다.
좋습니다. 방응모가 일절 편집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진 기자님의 주장을 일단 믿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응모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쏟아져 나온 친일기사들은 기자들이 자진해서 쓴 것입니까?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조선일보> 1939년 4월 29일자 사설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춘풍(春風)이 태탕하고 만화(萬花)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바이다. 성상폐하(聖上陛下)께옵서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鴻遠)한 은(恩)과 광대(廣大)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赤誠奉公) 충과 의를 다하야 일념보국(一念保國)의 확고한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 기자님, 봉건왕조시대에 정도전이 이성계에 지어바친 헌사도 아마 이보다 더하진 못했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조선 백성의 신문'이기를 포기하고 '일본 천황의 신문'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 사설 말미에 "신동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 황도일본의 위광을 빛내자"면서 충성맹세를 늘어놓은 뒤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번영을 받들어 축하하면서 우리가 경행하는 이유를 강조하여 둔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방응모의 '편집 불관여'를 높이 평가한 진 기자님의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응모가 세운 '편집 불관여'라는 그 빛나는(?) 전통을 후손들인 현 경영진이 계승하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최근의 <조선일보> 편집권이 경영진에 의해 심각하게 간섭받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조선일보> 사원들이 스스로 고백한 것입니다.
1995년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사내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우리 신문의 편집권은 독립돼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진 기자님, 놀라지 마십시오. "매우 독립돼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반면에 "매우 독립돼 있지 못하거나 독립돼 있지 못한 편이다"라고 답변한 사람은 절반이 넘는 54.2%나 되었습니다. 이 설문조사에서 "편집권의 독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조합원 중 61.4%가 "경영진"이라고 답한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지면이 경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유화(私有化)된 사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가관인 것은 경영자는 물론이고 그들의 친척이나 측근의 비리를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위해 지면이 왜곡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사건의 무마를 위해 기자들이 동원되기까지 했습니다. '편집권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조선일보>는 과거보다 더 후퇴한 셈이거니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각성과 분발이 요청되는 대목입니다.
(2)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어신문 말살정책을 통해 조선·동아 두 신문사에 대해 일본말로 신문을 발행하라고 요구했으나 계초는 거절했다. 그러자 일제는 세무조사 등의 교묘한 수법을 동원해 민족지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진 기자의 놀라운 순발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마 대한민국 정부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하고 있는 세무조사를 일제시대의 강권통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일말이라도 그런 불순한 의도가 없었기를 충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쓴 이 기사만 본다면 방응모는 민족혼을 지키려 한 천하의 애국자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시시각각 해방의 날이 찾아오던 바로 1년 전 <조광> 1944년 8월호에 "대만의 일어 해독자 6할에 비해 조선인의 일어 해독자 비율은 26%밖에 되지 않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한 글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1935년 창간된 <조광>은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뒤 방응모가 의욕적으로 확대 개편한 월간잡지로서, 현재 조갑제 씨가 사장으로 있는 <월간조선>의 전신입니다.)
결국 우리말과 우리 글을 버리고 일본말과 일본글을 생활화하자는 것이 이 기사의 논지일 터입니다. 더욱이 이 기사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이름하여 「국어를 상용합시다」입니다. <조선일보>와 방응모의 '국어'는 '일어'였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한글잡지인 <조광>에 일문 기사를 게재하는 등 친일잡지로의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우리말은 물론이고 '백의민족'의 상징인 백의(흰옷)를 자학적으로 비방했던 반민족적 신문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1927년 12월17일자 <조선일보> 사설입니다.
"백의(白衣)를 폐지하자. 꼴사나웁고 불경제이오, 외인의 조소조차 받고 있는 백의를 폐지하자. …백의인, 백의민족의 말은 명예이나 자랑삼어서 내세울 것은 못된다."
한마디로 우리말과 우리 옷이 '꼴사납고 창피하니' 더 이상 입지 말자는 주장입니다. 백의민족의 후예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정작 조선총독부가 '백의폐지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조선일보>의 그 기사가 나간 뒤 꼭 10년 후인 1937년입니다. 그나마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중의 민족감정 차원의 문제로 급격한 폐지는 반발이 예상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지요. 당시에도 <조선일보>는 이 정도로 앞서가던 1등신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기사에서 예의 '민족지'라는 용어를 스스럼없이 썼더군요. 그래요. 말씀 한번 잘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양산한 '민족지'를 가진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조선일보> 1930년 1월 12일자 사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잘 운용해서 몰락해 가는 항일운동을 근절해야 한다."(<조선일보> 1936년 12월 13일자 사설)
●"일본육군지원병제도는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자 성스러운 일이다."(<조선일보> 1938년 6월 15일자 사설)
바로 이것이 자칭 '민족지', '할말은 하는 신문' <조선일보>의 정체이자 뿌리입니다.
(3) 일제의 폐간 종용에 따라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1940년 8월 10일 폐간계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비바람 겪어서 이십춘(二十春), 이십추(二十秋), 1일에 일갈(一喝), 이 몸의 사명도 오늘로 종언(終焉)"이란 8월 10일자 폐간호 팔면봉은 계초의 속마음이었다.
진 기자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도 있지만, 정말 이러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그럼, <조선일보> 폐간호 사설부터 한번 봅시다.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일제의 지상목표인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분발했음을 읍소하며,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순응해서 폐간조치를 감수하기로 했다고 지금 <조선일보> 스스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을 진 기자만 몰랐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더욱이 신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설'이 버젓이 있건만, 정작 그건 외면한 채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팔면봉'을 붙들고 웬 '계초의 속마음' 타령입니까? 계초의 속마음은 도리어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천3백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를 실천해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사려 깊은 시정(施政)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명하게 관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조광> 1940년 10월호)
이 글에서 등장한 '시정'은 한일합방을 의미합니다.
(4) <조선일보> 폐간 후 계초는 서울 집을 팔고 가족을 의정부 집으로 모았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일제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일제 말 B-29가 하늘에 보이면 "일본놈들 망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흐뭇해 했다.
진 기자님,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조선일보> 폐간 이후 방응모가 <조광>을 확대 개편한 뒤 '천인공노할' 기사를 양산해 내면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에 나선 것을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천인공노'라는 말이 너무 과격하다구요? 그러나 진 기자도 <조광>이 보도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수긍하게 될 겁니다.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일제의 30년 조선통치로 문화조선 건설이 가능했다."(1940년 7월호)
●"신년을 맞이하여 천황폐하, 황후폐하의 성수무강하옵시기를 충심으로 비옵는 동시에 황태자 전하, 의궁 전하, 희궁, 효궁, 순궁, 청궁, 사내친왕 전하께옵서도 어(御) 건강하옵시기를 삼가 비는 바입니다."(1941년 1월호)
●"내 손으로 지은 쌀을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제라면 내 손으로 지은 쌀, 내 자본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들어 나라에 바치고, 그 처분을 바라는 것이 신체제이다."(1941년 2월호)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 역사에 대한 극악한 도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황폐하와 그 일족의 어(御) 건강? <조선일보>에겐 일왕이 '임금님'이었던 것입니다. 조선 민중의 쌀과 물건을 무조건 일제에 바쳐라? <조선일보>가 촉구한 대로 민중들은 1941년 전체 쌀 수확량의 43.1%를, 1944년 63.8%를 일제에 수탈 당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조선 민중들이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요.
그리고 당신은 방응모가 시국강연을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완벽한 오보입니다. 제가 이제부터 그 증거로 방응모의 친일단체 활동경력을 소상하게 알려드릴 테니, 앞으로는 제발 딴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조선문예회(1937년):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직된 단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시국가요와 황군격려가 제작. 14인의 한국인 회원 중 1인으로 참여. ●애국금차회(1937년): 황군 지원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결성된 단체. 발기인으로 참여.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1938년): 총독부 학무국이 조직한 단체. 강연반 일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중일전쟁에 전 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 ●배영궐기대회(1938년): 조선춘추회가 주최한 궐기대회에서 "황군 만세!" 선창.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년):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황국정신의 현양,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체제 경제정책에의 협력 등을 실천요강으로 내세워 결성한 단체. 발기인으로 참여. ●국민총력조선연맹(1940년): 황국정신의 양양, 징병·학병의 독려, 증산·헌금·공출 등의 총력운동을 전개한 단체. 참사로 참여. ●임전대책협의회(1941년):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가두유격대 일원으로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진행된 대회 참여. ●조선임전보국단(1941년): 친일세력이 총결집한 단체. 이사로 참여. ●조선문인보국회(1943년): 이 단체 산하 10개 잡지사 중 하나로 출전학도 격려대회 주최.
한 마디만 더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방응모가 미국의 B-29기를 쳐다보며 일제의 멸망이 가까워지는 것을 흐뭇해 했다구요? 진 기자님, 정말이지 이럴 겁니까? 아무리 <조선일보>의 녹을 먹고 산다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는군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일본군에 고사포를 기증하고, 일본군의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 급조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에 자본을 출자해 중역으로 피선된 사실을 알고도 그런 기사를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1941년 <조광>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우선 그 기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시대적 배경을 한번 설명해 드리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반도에는 미국이 곧 전쟁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 즉 '극동위기설'이 떠돌기 시작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일본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러자 조바심이 났는지 방응모가 <조광> 4월호를 통해 민심수습(?)에 나섭니다. 우선 '극동위기설'을 "못된 흉계를 가지고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행위"라고 경계하면서 "위축될 필요가 조금도 없으며 만약을 대비하여 물심양면으로 제반 준비를 갖출 것"을 촉구합니다.
진 기자님.
이제 당신이 얼마나 엉터리 기사를 썼는지 아시겠습니까? 물론 어떤 인물을 다룬다고 할 때 부정적인 측면만을 확대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빛과 어둠'을 동시에 조명하는 객관성과 공정성은 갖춰야 제대로 된 글이 될 터입니다. 더욱이 기자가 한 인물의 역정을 쓰려면 그 시대의 자료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요? 명색이 '<조선일보> 기자'라는 양반이 '<조선일보> 기사'조차 무시한 채 글을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진 기자님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합니다.
진 기자님, 방응모의 장남인 방재선 씨(계초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려주며 내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그는 98년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방응모 사장이 내 친아버지이긴 하지만 그가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친일행각에 대해서까지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위야 어쨌든 아버지가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겨레와 민족 앞에 진심으로 용서를 빌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말> 4월호에는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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