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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形形色色)"

동대문시장의 모습을 한 마디로 축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곳에는 아직도 옛모습과 현대의 모습이 충돌하며 끊임없이 돈을 불러들인다. 소매와 도매상인들, 그리고 눈길 한 번 마주쳤다가는 한 대 칠 것 같기만 한 사나운 표정의 남자들. 용돈을 쥔 아이들의 주먹에서 돈이 나오면 이내 그 손에는 쇼핑백이 자리한다. 밤늦도록 집에 가지 않고 상가 앞에 자리한 무대에서 춤과 노래를 즐기는 N세대들이 입을거리, 먹을거리, 볼거리를 사냥하러 나오는 제 1순위 장소인 동대문시장.

이 곳에서는 뭔가 특별한 언어로 의사소통이 된다는데..

교통체증없이 동대문시장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지하철이다. 1호선, 4호선의 동대문 역, 2호선, 4호선, 5호선의 동대문운동장 역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동대문시장으로 향하는 인파에 놀라게 된다. 걸음걸이의 보폭은 넓히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듯 앞으로 나가야한다. 좁은 인도(人道)에 가판상점이 줄지어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는 인도의 폭이 채 2미터가 되지 않는 곳도 많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다 보면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The Wall)>의 소시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무리 속에 섞여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주의할 점. 절대 남보다 먼저 나아가기 위해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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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 원에 팔리고 있는 섹시한 털 빤쯔 등등,장사하는 아줌마가 싸게 해준다고 사가라고 했지만..
ⓒ 배을선
인도가 폭이 좁고 사람이 많아서 천천히 걸어야 하는 주된 이유가 있기는 하나, 가판대에 마련된 물건들을 보며 지나가는 행인들이 많으니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요즘에는 컬러렌즈 선글라스 가판대에 사람들이 몰린다. 가격대는 보통 팔천 원에서 만 삼천 원 정도. 이 중의 대부분은 고급 브랜드의 선글라스 디자인을 그대로 복사한 이미테이션(imitatioon) 제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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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하는 알록달록 예쁜 헤어액세서리
ⓒ 배을선
압구정동, 청담동의 삔족들이 하는 고가의 다이아몬드 헤어액세서리는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가판대에 늘어선 예쁜 삔은 항상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즘 작은 삔은 한 쌍에 삼천 원, 큰 것은 한 개에 삼천 원 정도의 가격대에 팔린다. 삔을 파는 가판대에서는 '삼천원'이라는 가격표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가격은 광화문 지하상가나 대학로 등지에서도 통하는 일률적인 가격이다.

지난해부터 불어 온 여성들의 다이아몬드 스타킹 물결은 올해도 여전하다. 다만 봄철을 맞아 검정색 스타킹이 흰색으로 바뀌었을 뿐. 스타킹은 싸면 이천 원, 비싸면 오천 원에 거래된다. 물론 가판대 가격이다. 상점 안에서 사면 천 원에서 이천원 정도의 부담금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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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색의 파시미나와 염색가발이 유난히 유행하는 한국에서..
ⓒ 배을선


땡팔이(박스당 1~2천원에 사서 파는) 상인들이 도로의 한 면에 가방과 옷가지들을 늘어놓고 '무조건 오천 원'을 외친다.

물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닭꼬치, 순대 볶음, 떡볶이, 잡채, 튀김, 라면, 우동, 오뎅, 오징어 햄버거, 와플, 호떡, 김밥, 가판대에 올려진 음식들은 도시의 공해와 먼지로 장식되며 행인들의 입맛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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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오레 상가에 있는 특이한 매장
ⓒ 배을선
가판대 홍수 속의 관광을 끝내고 나면 갑자기 시끌벅적한 음악이 들려온다. 바로 밀리오레, 두산타워, 프레야타운 등에서 틀어놓은 호객용 음악이 이것이다. 음악은 보통 N세대들이 즐겨듣는 빠른 템포의 댄스뮤직이 주를 이룬다.

서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밀리오레에 들어갔다. 갑자기 라면과 떡볶이 냄새가 났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매장의 상인들이 음료수와 음식을 배달시켜 먹기 때문이다. 먹다가 팔고, 팔다가 먹는 상인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각 층마다 매점 겸 분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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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에 5천원! 싸고 예쁜 티셔츠
ⓒ 배을선
각각의 매장은 1~2평 정도가 대부분이다. 여러 종류의 옷가지보다는 바지면 바지, 스커트면 스커트, 티셔츠면 티셔츠, 정장이면 정장을 파는 매장이 많은데, 아무 무늬 없는 흰색 티셔츠는 삼천 원에, 예쁜 그림이 그려져있는 티셔츠는 오천 원 이상, 2만원도 넘는 티셔츠도 있다. 보통 스커트와 바지는 이만 원에서 삼만 원 선, 정장은 5만원 이상의 가격이 매겨져 있다.

동대문 상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파격세일' '원가세일' '균일가' '사이즈 다양 55 66 77' '만지지 마세요' 등의 메모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니 한 상인이 "아직 개시도 못했어, 싸게 가져가요 언니"라며 푸념을 늘어놓듯 팔뚝을 잡아챈다. 이 곳에서 모든 여자들은 모두 "언니" 혹은 "언니야~"로 통일되어 호칭된다. 나이가 지긋한 여성들에게는 "이모" 혹은 "엄마"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조금 점잖은 매장으로 들어가야 "손님"이라는 말을 가끔씩 들을 수 있다. 참, 아저씨들에게는 "삼촌", N세대 남자들에겐 "학생"이라 부른다. "오빠"라는 말은 말을 들으려면 동대문이 아닌 다른 곳에 가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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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릴린 몬로를 입자! 다양한 티셔츠
ⓒ 배을선


"개시도 못했어"라는 말은 아직 하나도 팔지 못했다는 뜻으로 동대문 상인들은 어떤 개시를 하느냐에 따라 그 날의 장사운세가 달라진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건값만 물어보고, 가격만 깎고, 입어보고, 들쳐보더니 그냥 가는 사람들에게 상인들은 "진상"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갖다 붙인다. "오늘은 진상들만 온다" 혹은 "진상 퍼레이드야"라는 말은 사가는 사람은 없고 귀찮게 하는 사람만 많다는 말. 청바지를 판매하고 있는 상인에게 "진상"이라는 말을 들은 손님이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물어보니, "손님한테 욕하는 나쁜 뜻이 아니라 장사가 안 되는 것, 못 판 것에 대한 자기위안일 뿐"이라며 둘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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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 한 장만 주세요
ⓒ 배을선
3층의 <고리>라는 매장에서 인상적인 메모를 발견했다. "세종대왕 한 장만 주세요"라는 메모였는데, 세종대왕은 만원, 즉 '만원만 주세요'라는 뜻이다. 이 매장의 상인은 밀리오레 운영위원회에서 가격표를 달아놓지 말라는 지시에 충실히 따르면서 손님들에게 싼 가격을 알리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다. 원래는 만 원 짜리 가짜 지폐를 붙여놓으려다 말았다고.. 세종대왕이 아니더라도 "한 장만 주세요"의 한 장은 만원을 의미한다. 퇴계 이황이나 천 원이면 더 좋으련만.

동대문상가에서는 여러 종류의 영어 약자가 쓰여진 메모를 볼 수가 있다. 바쁜 세상, 바쁜 상인, 그들은 스커트대신 S.K, 바지의 슬랙스대신 S.L, 쟈켓대신 J.K, 블라우스 대신 B.L 이라는 약자를 사용하고 있다.

구두매장이 몰려있는 7층으로 올라가니 벌써부터 여름 샌들이 눈길을 끈다. 아래층의 여성복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물건이 바뀌고 유행에 민감하다 해도 고급스런 느낌은 없었는데 , 이 곳의 구두는 꽤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꽁트> 매장의 상인에게 물어보니 이 곳 7층의 구두는 모두 수제화라고 한다. 가격대는 오만 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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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구두 신고 봄나들이 하세~~
ⓒ 배을선
서울에서 신발공장이 크게 밀집해 있는 곳은 서울역 뒤의 염천교와 성수동이다. 이중 싼 수제화는 염천교에서 만들어지고 꼼꼼히 만들어진 수제화는 성수동 공장에서 만들어지는데 이 곳의 구두는 모두 성수동에서 들어온다고 한다.

한참 구두 구경을 하고 있는데 한 매장의 상인이 기자를 보더니 "당가봐요 아가씨! 가격은 잘해줄께"라며 호객행위를 한다. "'당가봐요'가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으니, "아가씨, 구두에 발을 담가보라고, 퐁당?"이라 말하며 구두를 내민다. 이 곳에서는 구두도 신어보라고 하지 않고 담가보라며 권유한다. 처음에는 웃겼지만 신어보라는 말보다야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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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에 발을 당가봐요! 퐁당~~
ⓒ 배을선
마음에 드는 구두가 있어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뜸 "현금이에요? 카드에요?"라고 되묻는다. 오만 사천 원 짜리 구두를 현금이면 오만 원에, 카드면 오만 이천 원까지 싸게 해준다며 현금을 지불하길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왜 카드가 비싸냐고 물으니, "수수료가 몇 %, 세금이 몇 %, 또 뭐가 몇 %... 라며 끊임없이 '카드는 싫어'론(論)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아무리 카드 사용률이 증가했다해도 이 곳에서는 카드가 전혀 반갑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그들에게 반갑지 않은 '진상'이 되었다. 구두는 사지 않고 가격만 물어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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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기 청지갑?
ⓒ 배을선
그러고 보니 동대문 시장이 왜 N세대들에게 더 반가운 건지 그 이유를 알만했다. 쌈지에서 나오는 건 현금이지 카드가 아니니까. 동대문상가의 유행과 편의, 그리고 이 곳에서 사용되는 말조차도 그 어원을 추적하면 'N'이라는 코드와 일맥상통한 느낌이다.

오후 6시가 넘은 시각 밀리오레를 빠져 나오니, 언더그라운드, 혹은 무명(無名)의 N세대 댄서들이 춤과 노래를 펼치며 상가의 무대를 가득 채우고 그 앞에는 벌써 그들의 열렬한 팬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이 고개를 빼고 그들의 열정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매일 저녁 벌어지는 이 무대 때문에 동대문상가의 쇼핑객들은 '밀레족'과 '두타족'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었다.

또 다시 그 좁고 꽉찬 인도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사실 서울 어디에 북적거리지 않은 곳이 있을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재래시장이든 동대문상가든 상관없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북적거리는 이 곳에 와서 내가 쫓을 수 없는 N세대의 유행도 느끼고 싼 가격에 옷가지도 마련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좁은 도로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고 발도 밟히고 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가끔씩은 그런 기분에 퐁당 빠지고 싶기도 하다. 아니, '당가봐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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