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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안의 모란(牧丹)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돌담가 동백이 지고, 매화가 지고, 목련이 지고, 수선화도 벌써 피었다 지고, 목백일홍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모란이 이제 막 그 자홍색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모란을 보면 어릴적 그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던 영랑의 시가 떠오르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신라의 선덕여왕과 모란에 얽힌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사람이란 사랑을 잃은 뒤가 아니라면, 나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봄이 슬픈 줄을 알게 되는가 봅니다.
어느 해 봄날 오후부터 나 또한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었지요.
봄이 가긴 가는가 봅니다. 이야기가 자꾸 엇나가는 걸 보면요.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봄날이 가고 오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란에 대한 이야긴데 말이지요.
그것도 영랑의 모란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모란에 대한 이야기지요.
지금도 실려 있는지는 모르겠고 몇 학년 무슨 과목이었는지도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국민학교 교과서에 배웠던 그 이야기의 내용만은 뚜렷이 기억납니다.
모란꽃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예지력이 뛰어남을 선전하기 위해 유포된 지기삼사(知機三事) 중 한 사건입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모여 있는 어전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당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내 왔는데 어린 덕만공주(후일의 선덕여왕)가 꽃 그림을 한번 척 보더니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나 향기가 없다"고 말했다지요.
이에 진평왕이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고 물으니 공주가 "향이 있으면 나비가 같이 그려져 있어야 하는데 나비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꽃은 향이 없다"고 대답했다지요.
이에 왕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어린 공주의 총명함에 크게 탄복했다는 용비어천가가 모란꽃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린 덕만 공주가 얼마나 총명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모란에 과연 향이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하여 작년, 재작년, 그리고 올 봄에도 모란에 코를 박고 향을 맡아볼 따름입니다.
작년, 재작년과 다름없이 올 봄에도 모란은 어김없이 현기증 날만큼 짙은 향기로 코를 찔러옵니다.
이상하군요. 모란에는 분명 향이 있는데도 어째서 향이 없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것일까요.
유신시대, 그 이야기를 교과서에 수록했던 까닭은 아마도 교육 이데올로그들이 "왕이 될 재목은 천부적으로 총명하게 타고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지 싶습니다.
그것이 영구 집권을 꿈꾸던 박 정권 자신의 이데올로기이기에 다름 아니었을 테니까요.
자장율사를 파견하여 당나라의 인가까지 받은 하생 미륵불로 선전되던 선덕여왕이고 보니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유포된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야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지만 오늘날에까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교육되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요.
혹시 교과서들이 많이 바뀌었으니 지금은 그 이야기가 없어졌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진실인 것처럼 교육되어지는 것이 어디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뿐이겠습니까.
아직도 친일파를 민족주의자로, 친일 신문을 민족지로, 맥아더 따위의 전쟁광을 영웅으로 가르치는 이 나라 교육현실에 비하면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쯤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을 겁니다.
향기 있는 모란에 향이 없다고 거짓으로 가르친들 모란의 향기가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어느 봄 오후, 나는 봄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모란꽃 그 진한 향기에 취해 뜰 앞에 오래도록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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