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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록 이파리들이 햇살에 화들짝 놀라 일제히 그 고운 빛깔을 터뜨려대고 있는 좋은 봄날입니다. 멀리 있는 님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 한껏 행복해지는 날씨였지요. 동수가 ‘평화의 마을’을 떠나고 4개월만의 만남입니다.

문짝이 하나 떨어져나가 쓰러져 있는 대문 곁에서 커다란 누렁개 두 마리가 맹렬하게 짖어댑니다. 마침 못자리를 돌아보고 오는 길이라는 동수의 고모가, “서울서 왔다꼬? 동수야! 야, 동수야! 얼릉 나와 봐라이∼”하며 방에 있던 동수를 불렀습니다.

동수가 마루 문을 삐죽, 열고 내가 온 걸 보더니 얼른 도로 들어가 버립니다. 아직도 여전하네요. 설핏, 웃음이 납니다. 흙투성이라 심란하다며 방을 훔치는 고모님을 피해 동수는 저만치 앉아 있습니다.

“여긴 뭐 하러 왔어요?”
고모님이 나가자마자 대뜸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방 저 쪽 구석에 가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버리는군요.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고,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찾아간 건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녀석은 저를 밀어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동수의 잘못일까요? 세상에 상처받은 건 동수인데 말입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 생각만 하고 찾아가면 안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랬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려고 대전에 찾아간 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제가 ‘평화의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온 바로 그 다음 날 동수는 고모를 따라 순창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동수와 나의 인연을 알고 있는 학교 선배가 대전에 들렀다가 동수 생각이 나서 옷 한 벌 사 들고 찾아갔다가 녀석이 가고 없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뭐랄까, 그건 참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는데요. 순창에 살고 있는 고모가 와서 동수를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쭉 애육원에서 지냈고 예정에도 없던 일이어서 그 곳 선생님들도 당황스러워 하셨지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99년, 대전에서였습니다. ‘평화의 마을’에 살고 있는 꼬맹이들과 ‘가족만들기 여름캠프’를 함께 준비하면서 인연을 맺었구요. 애육원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아이들과 결연을 맺을 가족을 찾아주는 캠프를 열고 있었거든요.

원래는 온전한 가족, 그러니까 부모랑 형제가 두루두루 있어서 가정 안의 다양한 역할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그런 가족에게만 결연의 자격이 주어집니다만 그 해에는 특별히 혼자 사는 저에게까지 행운이 돌아왔답니다. 행사를 쬐금 도왔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동수는 말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뭔가를 물어도 두 마디 이상의 대답을 듣기가 힘들었지요. 그래도 저는 동수가 좋았는데요. 그건 동수가 착하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말을 잘 듣는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아이가 동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아이가 제 인연이 되어 제 곁에 왔기 때문에 무작정 동수가 좋았던 거지요. 짝사랑하듯 그렇게 오랫동안 동수 곁에서 맴돌며 전 참 많은 걸 배웠더랍니다.

“난 벌써 다 까먹었어요. 누구세요?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화가 났는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빤히 노려보는 동수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잊고 싶어하는 과거일 거란 생각,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 다 잊고 살겠다 다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겁니다. 어째서 늘 동수에겐 이렇게 제가 모자라기만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는 뭐하러 써요? 이제 다시 볼 일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화의 마을 선생님이 안부 전하더라는 말을 전했더니, 그만 어쩔 수 없는지 녀석의 눈도 젖어드는군요. 복작대며 한 방에 같이 살던 형들, 동생들이 어떻게 그립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 곳엔 또래 친구도 하나도 없다는데 말입니다.

동수가 다니는 풍산초등학교 5학년은 전부 8명이라 했습니다. 동수의 담임 선생님은 이제 갓 발령받은 여자 선생님이시라지요. 기가 막힌 일은 동수네 학년에 남자가 녀석 하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안 그래도 말이 없는 아이가 더욱 과묵해질 노릇이라 속상했습니다. 또래 친구라도 있으면 좀 빨리 적응할 수 있을 텐데요.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는 벌써 몇 년 전에 폐교돼 버리고, 25분이나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집에 오다가도 길에 사람이 있으면 아예 사람 없는 먼 길로 돌아와 버린다는 동수. 아직도 이렇게 사람을 피하고 가린다는 얘기를 듣고 속상해서 눈물이 다 납니다. 우리 동수, 마구 행복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모습 보고 저는 그만 짐을 벗어버리고 싶어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됐습니다. 동수 생각을 먼저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 편하고 싶어서 떠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요.

잠은 고모랑 고모부가 주무시는 안방에서 같이 자고, 공부는 대학 2학년인 형의 방에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은 다 장성한 다음이라 동수의 말동무가 되어주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얼굴은 참 매끈해져 있었습니다. 보기 좋게 살이 올라서 조금 통통해져 있기도 했구요.

고모부님이 그러시대요, 처음 데려왔을 땐 땟국물 줄줄 흐르는 ‘도시촌놈’이었다구요. 그도 그럴 것이 가끔 만날 때 동수 목덜미를 볼라치면 때가 땀이랑 범벅이 된 채 얼룩덜룩 무늬를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남자라면 데리고 목욕탕에라도 한 번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첨엔 촌구석이라 오기 싫어했다구. 그래도 어떡해? 거기 그냥 둘 수 있나, 어디? 대전 있는 고모네들이 맡으려고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게 맘만으로 되나? 우리야 막내 대학 가고 이제 다 키워놨으니 말이지만. 그래도 심심하고 답답할 거야. 그래도 어떡해?”
말씀은 그리 하시지만 남의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하겠습니까?

고모부님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동수를 바라보면 연신, “야, 동수야! 서울서 너 보려고 왔단다. 좋지? 서울서 일부러 왔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땅에 기대 사는 순한 마음이 동수를 품어 안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가라고 해야 나가지, 안 그럼 나가도 안 혀. 한사코 방에만 있지.”
“애가 아니라 영감이여∼.”
고모와 고모부님은 번갈아가며 동수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동수에게 마을 산책 가자고, 구경 좀 시켜달라고 했는데도 녀석이 “몰라요, 하나도. 안 가 봤어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거지요. 이 곳에 온 지 벌써 넉 달이 다 되어가는데 마을 한 번 돌아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곰살맞게 동수 손을 이끌고 여기저기 다녀줄 만한 그런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그도 어려운 모양이었습니다.

농사 짓느라 정신없는 두 분도 힘드시겠지요. 누구 한 사람 얘기 나눌 상대가 없어서 늘 혼자 방에만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슴이 너무 아프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맘이 아팠습니다.

동수 녀석,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자기 동생 얘기가 나오니 눈을 반짝이네요.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꼭 찾아갈 거란 얘기를 언젠가 하더니, 아직도 그 결심은 유효한 모양입니다. 동수의 엄마도 어디선가 동수가 행복하기를 빌고 있을 테지요. 동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허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 있을 거예요?”
“왜, 누나가 보고 있으니까 싫어?”
“…….”
“언제 갈 거예요?”
“왜? 그만 갈까?”
“갈 거면 빨리 가요.”
그렇게 말해 놓고 동수는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자고 가마, 자신할 수 없었던 건 그 밤에 고모님의 큰딸 내외가 다니러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수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말입니다.

“가끔 전화하고 그라요.”
고모부님이 제 뒤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십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피붙이라고 거둬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다행이란 것이 아니라, 동수만을 온전히 챙겨 주고 씻겨 주고 공부시켜 주고 사랑해 줄 그런 공간이 생긴 것이 다행입니다. 동수가 다른 아이들처럼 떼도 쓰고 막무가내로 울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아이가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이 동수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라면 저도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그래요, 그래야겠지요. 그래도 가끔은 책이라도, 때 맞춰 입학선물이나 생일선물 같은 거 보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론 툴툴대더라도 속으로는 조금쯤 기뻐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동수를 향한 제 해바라기는 아마도 아직은 더 오래 계속될 모양입니다. 동수가, 정말로 나 같은 사람과 맺은 인연 따위는 완전히 잊고 살게 될 그런 행복한 날이 올 때까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내 어린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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