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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으로 가는 경의선로가 뚫리면 가장 먼저 북으로 차를 몰고 폼나게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북한의 평양특별시 인민위원회에서 교부해 준 면허증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교통부 장관이 발급한 운전면허증까지 60여 년의 '무사고 운전경력'을 이어 온 이상현 옹(82.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상현 옹은 지금도 평양에서 교부받은 면허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제1843호로 돼 있는 이 면허증에는 교부처가 평양특별시 인민위원회 내무부장으로 돼 있고 1949년 10월 11일 신규 발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면허증은 이 옹이 두 번째로 발급 받은 것이다. 첫 번째 면허증은 20세 때인 1940년 발급 받았으나 잃어 버리고 재시험을 통해 두 번째로 딴 운전면허증이다. 이제는 누렇게 변해버린 낡은 면허증에는 지나온 긴 세월과 함께 이 옹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스며 있다.

이 옹은 북한 면허증을 소지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불순분자로 몰리게 될까봐 장롱 깊숙이 이를 숨겨오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야 큰아들 승규(38. 박정 어학원 차장)씨에게 처음으로 면허증을 보여줬다.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태어난 이 옹은 6세 때 평양으로 이사,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 옹이 자동차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17세 되던 해 자동차 조수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자동차가 귀했던 시절, 운이 좋았던 그는 안 몰아 본 외제차가 없을 정도로 자동차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이 옹이 주로 몰았던 차는 화물차다. 면허 취득 후인 49년 평남 화물자동차에 취업, 운전사로의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50년. 상업관리소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던 이옹도 전쟁을 만났다. 양잿물을 싣기위해 서울로 내려왔던 중 전쟁이 터졌다. 그리곤 이옹의 집과 서울 사이에 3.8선이 놓였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부모와 처, 3형제 등 가족들을 3.8선 이북 평양에 두고 이 옹은 홀홀단신 남한에 눌러앉았다.

▲자신의 60여년 운전인생을 회상하고 있는 이상현 옹. ⓒ 김준회
한국전쟁 당시 7사단 감찰부장 전용차 운전병으로도 일한 바 있는 이 옹은 53년 휴전과 함께 서울의 효창동에서 부인 김기인(71) 씨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운전은 경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운전이 남들에게는 선망의 직업이었지만 홀홀단신 남으로 넘어온 이 옹에게는 생업이었다. 당시 인천부두에서 구호물자를 수송하던 대륙화물에서 바퀴가 10개나 달린 대형 화물차 제무스 십바리(이 옹이 부르는 이름)를 몰았다.

이후 구호양곡이 끊기고 회사가 한진으로 바뀌면서 1958년 문산역 앞에 있었던 한진으로 옮겨왔다. 이때부터 문산에서 터를 잡고 2남 6녀를 두었다.

66년 한진에서 근무하며 월남으로 건너가 원조물자 수송역할을 맡기도 했던 이 옹은 68년 경기도 파주시 문산으로 돌아와 한진에서 퇴사한 뒤 삼륜차를 구입, 개인사업에 뛰어들었다.

평택과 대천 등지에서 화물사업을 하던 이 옹은 70년대 후반. 석산에서 인조석을 나르는 화물차를 몰다 80년대 후반부터 유치원 차를 몰기도 했다. 그러나 유치원 차를 몰던 90년, 젊은이들의 싸움을 말리다 넘어지며 눈과 귀를 다쳐 60여 년간 잡았던 운전대를 놓았다.

한편 이 옹은 지난 90년 적성검사 당시 싸움을 말리다 다친 귀의 부상으로 "청력이 약해져 면허증 갱신이 어렵다"는 검사관에게 "평생을 업으로 알고 살아온 운전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 1종대형 면허대신 소형차만 운전할 수 있는 2종 보통면허를 발급 받았다.

이 옹은 지금도 분단의 언저리인 파주의 문산에서 고향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기도 했던 그이지만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이 옹은 경의로가 뚫리고 통일의 그날이 하루 빨리 다가오기를 기원하며 아직도 면허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요즘도 가끔씩 자식들의 차를 몰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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