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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필자는 '국사'를 그렇게 좋아한 편이 아닙니다. '숫자'와 친하지 않은 전형적인 인문계 적성인 내가 가장 전형적인 인문계 과목인 '국사'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국사'를 '재미없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너무 약탈과 침략 그리고 식민지지배의 대상이 된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거지요. 특히 구한말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대목은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읽기도 싫었던 것이 철없던 어린 시절의 맘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 '역사에 관심을 가져보자'라는 맘자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역사관련서적을 서점에 갈 때마다 만지고 사들고 읽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역사책을 사 모으고, 읽어서 아마 그 어떤 분야보다도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 취미중의 하나가 '역사'이든가 아니면 전생에 "역사"와 관련된 직업을 가졌든가... 어쨌든 우리나라 역사책을 읽다보면 역시 안타까운 장면도 많고 안타까운 인물도 많습니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계속 임무를 수행해서 훗날 개성사람들에 의해 '성계육(肉)'이라는 저주를 받는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해 청나라에서조차 칭송이 자자했고 이미 서구문화도 접했던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질투를 받지 않고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효종이 송시열 같은 인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북벌정책을 계속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조선시대 마지막 불꽃을 가졌던 왕,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지 않고 개혁정치를 계속 수행해 나갔으면 어땠을까?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 내게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인조반정에 의한 광해군의 폐위일 것입니다. 광해군이라는 호칭이 말해주듯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후 후금에 의해서 금수강산이 풍비박산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한낱 자연인이 된 불운의 왕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했듯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은 세종대왕이 아니고 바로 광해군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시하고픈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광해군과 세종은 세자 책봉과정, 제위하기까지의 과정, 제위기간의 분위기, 선왕의 후원여부 등에서 천양지차입니다.

우선 세종은 형 양녕대군의 양보와 태종의 선택으로 편안하게 세자자리를 차지하지만 광해군은 세자책봉과정에서 선조의 선택도 받지 못했고 광해군의 총명함과 사람됨을 알아본 신하들과 선조의 긴 신경전 끝에 간신히 세자에 책봉됩니다.

세자에 책봉되고 곧바로 피난을 떠나고 (임진왜란)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7년 동안의 전란을 겪고 나서 또 다시 인목대비의 소생 영창대군과 다시 한번 왕자리를 놓고 경쟁을 해야 하는 아픔도 겪었지요. 더구나 세종은 평화시에 태어나 선왕 태종이 각종 숙청을 통해서 왕권강화를 확고하게 한 후에 제위에 올라 마음껏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었지만 광해군은 즉위 후에도 수구세력에 의해 끊임없는 견제와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세종이 성군이라고 불리지만 사대부에게나 성군이었지 일반 민초들의 성군이 아니었다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종의 "수령고발금지법"이란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은 그 어떠한 경우도 고발을 할 수가 없다는 법이죠.

물론 이런 법을 제정한 이유는 나름대로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방관리로 하여금 마음껏 수탈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종이 사대부의 성군이라면 광해군은 일반 백성의 성군이라 할 만합니다.

민중들을 위한 법인 대동법을 실시했고 광해군 즉위 2년후 백성들의 생활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점이 그가 누구의 편에 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금과 명나라의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그의 뛰어난 업적입니다. 숱한 반대파의 견제와 위협 속에서도 이런 업적을 남겼으니 그가 만약 쫓겨나지 않고 오랫동안 제위에 있었다면, 세종처럼 좀더 좋은 환경을 가졌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광해군 자신이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실학자였기 때문에 서민들의 아픔을 역대 어느 왕보다 잘 알았고 또 지루한 이론보다는 실천적인 행동을 중시한 왕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조식의 수제자이자 의병장이고 북학파의 거두인 정인홍과 광해군을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역적으로 몰린 정여립이나 패륜아로 낙인찍힌 정인홍 같은 인물을 재조명하고 광해군의 업적을 재조명한 점이 칭찬할 만합니다. 다만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등으로 유명한 정철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비판이 많이 가해지고 있어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정철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정여립같은 시대의 인재를 누명을 씌워 죽인 천하의 탐관오리로 여겨지고 있고 이황이나 이이는 민생들에겐 관심이 없고 오직 집권세력의 이익만 대변하며 나라야 어떻게 됐든 황당한 이론싸움만 하는 한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 부분은 약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고 좀더 연구가 필요하며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북학파나 광해군의 업적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요즘은 너무 진부한 말이 되었지만 한번 손에 들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재미도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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