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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다시 읽고 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어 그런지 그의 <자유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 바로 연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도 애절한 짝사랑에 대한 그의 자유론적 해석을 들어보자. <자유론> 4장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 중 일부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교제하는 데 매이지 않고 이를 회피할 권리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에게 가장 사귀기 좋은 동료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의 기본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무한한 자유를 누려라" 이거다. 그렇기 때문에 속으로만 사랑하고 앓아버리는 짝사랑은 밀의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짝사랑의 자유, 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인가.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이렇게 시작하는 짝사랑의 노래 <그집앞>. 혹은 로맨스 소설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러시아의 투르게네프의 친구의 여동생을 짝사랑하는 소설 <짝사랑>도. 물론 이 부분의 대가는 역시 헤르만 헷세이다.
그의 <청춘이여 아름다워라>라는 중편은 친구의 여동생이 아니라 여동생의 친구를 짝사랑하는 지지리도 못난 오빠 이야기가 나온다.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휴가 온 1주일 동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는 마지막 날 딱 하루였다. 큰맘 먹고 잔디밭에서 고백하려는 순간 그 똑똑한 여동생 친구는,
"됐어요. 우리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렇죠?"
즉 한 마디만 더 하면 연인관계는 물론 친구관계까지 끝내버릴 수 있다는 반공갈 협박으로 아름다운 청춘의 마음을 짓밟아버렸다.
존 스튜어트 밀도 마찬가지이고 헤르만 헷세도 마찬가지이다. 짝사랑의 자유는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란다. 이 애닲고 진실한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순간 밀의 논리대로라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유의 침해자가 되어 법적 사회적 처벌을 받아 마땅하게 된다.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토커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존 스튜어트 밀도 20년 동안 유부녀를 짝사랑하다 20년 후에 남편이 죽은 뒤에 그녀와 결혼했다. 물론 그 유부녀도 밀을 사랑했으니 그가 스토커는 아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해보자는 거다. 만약 19년 동안 유부녀를 사랑해왔는데 그 유부녀가 20년째 접어들어 갑자기 실증을 내며 존 스튜어트 밀을 차버렸다. 그때도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는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렇게 말하며 "사랑하기에 그대를 떠나간다오." 정처없이 떠나갈 것인가? 솔직히 그러지 않을 거잖아. 안 그래 친구?
물론 나는 스토커를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연애 문제를 법적 사회적 체제로 끌고 가지 말고 서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차원에서 하나의 룰을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찬 자의 의무, 차인 자의 권리이다. 이것은 밀이 이야기한 자유론 원론보다 하위에 둬야 한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 찬 사람은 찬 행위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며, 차인 사람은 차인 행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전제가 있다. 만약 내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다고 치자. 나는 그 상대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가서 프로포즈했다. 그 상대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나를 찼다. 이때는 찬 자의 의무와 차인 자의 권리가 적용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대가 그 상위개념인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을 권리"를 철저하게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 상대가 장미 꽃 한 다발을 받은 다음,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이제 찬 자의 의무와 차인 자의 권리가 적용된다. 그 상대는 이미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 자의 의무와 차인 자의 권리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이다.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남을 찬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이다. 일단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성찰해서 남을 찬 횟수가 남에게 차인 횟수보다 많은 사람은 아무리 교회 가서 기도해도 천당은 못 간다는 걸 명심해라. 남의 가슴에 그렇게 못을 박고 무슨 천당을 가는가?
정말 그래도 천당에 가고 싶다면 바로 찬 자의 의무를 다하여라. 그럼 가능하다. 찬 자의 의무란 별 게 아니다. 계속해서 차주는 거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자신의 업보라 생각하고 끝까지 차주는 게 그의 의무이다. 왜 그럴까? 차인 자가 수긍을 하지 못 하고 있을 때, 자기가 차였다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 지지리 못난 것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은 끝까지 차주는 것밖에 더 있던가? 이런 교육을 해줄 의무가 있다는 거다.
반면 차인 자들은 바로 그런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실연클럽 커뮤니티에서 가장 답답한 애들이 이런 애들이다.
"오늘 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잠이 안 와요. 어쩌면 좋아요?"
나는 이런 글 아래에 꼭 댓글을 단다.
"야. 그럼 전화 걸어. 목소리 들어. 들으면 될 거 아니야."
차인 사람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래도 사랑하는 상대에게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과 둘째는 다시 차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미 자기 자신을 찬 사람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서 무엇하며, 이미 자기 자신을 찬 사람에게 다신 한번 더 차이는 게 뭐가 어떤가? 그렇게 차이고도 정신 못 차리고 남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차인 자의 권리 중에 한 가지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차인 후에 그 사람에게 마음이 떠났어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척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미 그 사람이 다른 상대와 만나고 있고 이미 내가 다른 상대와 만나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척하여 그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내게 오면 이번에 카운터로 차든지 아니면 내게 무릎꿇게 하고 받아주든지 그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권리이다.
이건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 된다. 그 사람을 잊었는지 스스로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생각이 나면 곧바로 전화 걸어, "사랑해"를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일반적인 경우 "사랑해"란 말은 함부로 뱉는 게 아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는 자의 의무가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그걸 함부로 뱉는 건 사기꾼의 행위이다. 그러나 차인 자의 권리 속에서는 "사랑해"를 아무렇게 내뱉어도 상관없다. 이미 찬 자와 차인 자의 관계 속에서 찬 자는 그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워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차인 자는 그 의무를 찬 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사적 관계는 오히려 공적 관계보다 더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 차고 차이는 관계 속에서 찬 자가 모든 걸 누리다면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찬 자도 일정 정도 고통을 분담해야 하고 찬 자고 일정 정도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게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상호간의 자유에 부합하는 것이다.
참고로 내 예를 들면 나는 찬 적보다 차인 적이 훨씬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천국에 갈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도 내가 한 번 찬 여성에게 최대한 예의를 지켰던 일을 소개할까 한다. 3년을 날 짝사랑했던 여성에게 한 번도 "널 좋아할 수도 있어" 이 말을 하지는 않았고 기대감을 준 적도 없다. 다만 만나자 그러면 짜증을 내면서도 만나줬던 것밖에 없다. 나는 그래도 마지막 만남에서 그 여자가 내게 쏟아버린 소주를 그대로 맞아주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게 찬 자의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예술 웹진 미인(www.meinzine.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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