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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반민특위, 승자와 패자>
방송 : 2001.5. 25(금) 밤 9시 55분 - 11시까지

1) 잘못 꿰어진 첫 단추 , 반민특위

해방 후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친일파 처단 등 일제 잔재 청산과 자주적인 통일국가의 수립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지 못한 해방이었기에 그 이후의 상황은 우리 민족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특히 친일파 청산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안고 출발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자처단 특별위원회)는 친일세력들의 치열한 저항과 그들을 필요로 한 이승만 반공체제의 연대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한때 대표적인 친일파인 박흥식(화신백화점 총수), 최린(33인 중 1인), 이종형(일본군 밀정 혐의, 대한일보 사장), 노덕술(악질 고등경찰), 김태석(강우규 열사를 고문한 고등경찰), 김연수(친일기업가), 이광수, 최남선 등을 체포하면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생존본능이 강하고 처세에 능한 친일파들이 호락호락 당할 리는 없는 일. 그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모는가 하면 간부들의 암살 음모까지 도모하기도 했다.

급기야 1949년 6월 6일 일단의 무장한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위의 물리적 기반인 특경대를 유린하고 반민족 피의자들의 수사기록을 탈취함으로써 특위를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이승만은 이튿날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이는 자신이 지시한 일임을 밝히면서 경찰의 불법행위를 비호했다.

이로써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세우려던 민족적 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특히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김구 암살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이 갖고 있는 연관성에 대해서 의혹을 가지는 이는 아직도 많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는 어떻게 해서 반민특위가 우리 현대사에서 잘못 꿰어진 첫단추가 됐는지를 살펴 보았다.

현재 반민특위에 직접 참여한 분으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이는 이원용(82세, 당시 총무과장), 이병창(85세, 당시 특경대장), 백재호(85세, 당시 전남지역 조사관), 심륜(78세, 당시 경남지역 조사관) 등 4분이다. 그리고 당시를 목격하고 증언하는 이로는 김인식(제헌의원), 선우 진 (당시 김구선생 비서관), 오소백(당시 반민특위 출입 합동통신 기자), 선우종원(당시 검찰), 장석윤(당시 미군정 고문) 등이 있다. 이들을 통해 미군정 이래 건국 초기 상황에서의 친일파 청산을 둘러싼 여러 정치세력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2)현재 진행형의 과제

일본의 우익에 의한 교과서 왜곡 시비가 들끓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문제로 우리 사회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일제 잔재 청산의 미흡함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러면서도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 그 문제를 다시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얘기가 아니냐는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는 친일파 청산 문제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임을 보여 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과 일제 고등경찰 하판락씨와의 사례. 청년시절 독립운동을 했다가 일제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했던 이광우씨. 그는 1949년 8월경 반민특위에 증인으로 나가 자신을 고문했던 일제 고등경찰의 경부보였던 하판락을 고발했으나 이미 형식적인 마무리 국면에 있던 반민특위는 하씨를 무혐의 처리했다.

그 이후 이광우씨는 울분과 고문의 후유증 속에 살아야 했고, 하씨는 시의원에 출마하고 노인회 회장으로 일하며 시의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안락한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반민특위 재판 과정에서 기소됐던 반민피의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하씨는 취재팀과의 만남에서 당시 이씨에 대한 수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한사코 고문혐의는 부인했다.

또 자신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제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반민특위 경남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김철호 선생의 경우는 보다 비극적이다.

통영 출신인 그는 6.25 당시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례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가 반공체제의 강화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김철호 선생은 지난 95년에, 이광우 선생은 지난해에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52년전 친일세력들은 반민특위로 대표되는 친일파 청산 기도를 분쇄하고 현실의 권력게임에서는 승자가 됐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승자로 자리매김하고 대를 이어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는 동안 우리 역사는 상처받고 민족정기는 훼손됐다.

반면 민족의 지조를 지키고자 투쟁했던 이들은 현실에서 패하고 영락했다. 반민특위의 승자와 패자, 그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현실의 승패와 역사의 승패는 어떻게 다른가.... 프로그램의 종반부에서는 반민특위 생존자와 독립유공자 후손의 처연한 현실을 그렸다.

3)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 사례

한편 제작진은 실패로 끝난 한국의 친일파 청산 사례를 논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프랑스에서의 나치협력자 숙청 사례를 알아보기 위해 현지취재를 실시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을 벗어난 뒤 비시정권 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했다. 즉결처분과 정식재판을 합해 이 인원은 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반역자로 사형이 집행됐던 인사 중에는 파시스트 총리 라발, 퓌슈 전 내무장관, 민병대장 다르낭, 언론인 조르주 쉬아레스('오늘'지 사장), 브라지야크('내가 도처에 있다'지 편집장), 장 뤼세르('신시대'지 사장), 장 파키('라디오 파리' 진행자) 등을 들 수 있다.

프랑스는 해방 직후 분노한 민중에 의한 보복적 처형도 많았다. 그러나 드골이 나치협력자 처단을 위한 최고재판소 설치 등을 훈령으로 내리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정의를 수립하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살려가면서 전후 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조성했다. 나치협력자 처단에 관한 한 좌우가 서로 협조했던 것도 특기할 만하다.

또한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경우 시효에 적용되지 않는 반인류범죄로 처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바르비, 파퐁 등의 경찰, 관리 출신 등에 대해 50년이 넘어서도 역사적 심판을 계속 해오고 있다. 불과 4년여의 점령을 당한 프랑스가 이처럼 확고한 처단을 하고 그것도 언론인, 지식인에게까지 엄정한 적용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프랑스 취재분에는 사계의 권위자 마르크 페로(사학자), 앙리 아무루(저술가), 바르비를 추적해 단죄한 유태인 변호사 세르즈 클라스펠드, 레지스탕스 출신 의사, 유태인 피학살자 유족 등이 등장하고 재불 칼럼니스트 홍세화씨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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