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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세계적인 반전운동은 냉전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의 찬바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반도의 또다른 전쟁의 불씨가 될 뻔했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그 파장을 통해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한다.

당시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 여부를 두고 북·미 간에는 11개월 간 뜨거운 설전이 붙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최대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회담은 철저히 남한을 배제한 채 비밀에 부쳐진다.

결국 미국의 사과를 받아낸 북한의 승리로 사건은 종결되는 듯했으나, 미국은 승무원 송환 이후 사과를 번복하였고, 북한 억류 당시 영해 침범을 인정했던 승무원들은 북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자백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기에는 나포 당시 송신 기록과 항해장비의 오차 등 석연치 않은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오늘(29일) 밤 방송될 '푸에블로 나포사건' 편에서는 승무원들과 한·미 외교 담당자, 그리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세 나라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는 푸에블로 나포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68년 전세계적인 냉전의 끝자락에서도 차디찰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의 긴박한 상황을 되짚어 보고,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현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당시 사건의 교훈을 살펴본다는 것.

사건 당시 CIA 보고서와 미 국방성 문서도 북한이 공해상의 푸에블로호를 의도적으로 나포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미 CIA 보고서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영해 안에 있었다고 믿는다"

푸에블로호 나포 다음날 작성된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행동은 계획된 것이 아니며 그들은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했다고 믿는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으로서도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해 침범의 가능성은 푸에블로호의 임무의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 전자정보 탐색을 위해선 해안 가까이 접근할수록 유리했고 복잡한 북한의 해안선을 따라 임무를 수행하면서 항상 13마일 영해선을 유지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건 당일인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보고한 위치좌표들이 나와 있는데, 오전 10경. 정보탐지를 위해 배가 정박한 곳은 북위 39도 24분, 동경 127도 59분이다. 북한군이 나타나자 배를 80도 돌려 동쪽으로 달아났다고 승무원들은 주장했지만, 도망가면서 푸에블로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엉뚱하게도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도망간 방향이 북한의 해안쪽이었다는 얘기다.

승무원 송환 이후 열린 미 해군조사위원회. 해군제독들과 군사전문가들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상대로 2달에 걸쳐 조사를 벌였는데, 30년만에 공개된 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뜻밖의 기록이 나온다.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를 11번 침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제시하며 당시 부함장 에드워드 머피에게 사실을 묻자 그는 그러한 기록이 남겨져 있었음을 인정했다.

영해침입 여부를 판단할 열쇠는 로란. 이것은 1968년 푸에블로호가 사용했던 항해장비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기였다. 미 해군 조사위원회는 로란이 최고 5마일까지 오차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11번의 영해침입은 로란의 오차로 인한 잘못된 기록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 문서 "북한 영해 3마일까지 접근하라"
하지만, 북한의 입장은 달랐다. 북한은 로란의 기록과 항해일지를 토대로 푸에블로호가 임무 수행기간 동안 모두 17번 영해를 침입했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로 배에서 입수한 미태평양함대의 명령서를 제시했다. 거기엔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 3마일까지 접근해도 좋다는 미태평양함대의 허가문구가 나와 있었다.

최근 해제된 미 국방부 기밀문서
"가능한 한 북한 해역에 가깝게 접근하라,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라"

미 국방부 기밀 문서에도 이와 비슷한 명령들이 나타난다. "푸에블로호는 정보수집을 위해 가능한 한 북한 해역 가까이 접근할 것. 그리고 이런 공공연한 정탐행위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는 것"이 배의 임무 중 하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 직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공격 계획인 'Freedom Drop'작전을 세웠고 북한도 전군 동원령을 내려서 맞섰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건의 당사자였던 미국은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은 사건 다음 날인 24일 밤. 세계 유일의 핵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로 급파한다.

미국의 반응은 강경했다. 항공모함 두 대를 추가로 출동시키고 공군전투기 361대를 남한에 배치한다. 공해상에서 미 해군함정이 나포된 것은 미 해군역사상 176년 만에 처음 있는 일. 미국은 북한 선박 나포, 원산항 기뢰 부설, 제한적인 대북 공습 등 10여 가지의 군사 대응방안을 세운다.

모든 군사적 준비를 마쳤다는 존슨 대통령의 선언. 그 속에는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공개된 미 국방부 기밀 문서에는 'FREEDOM DROP'이라는 당시 핵사용 작전 계획이 나와 있다.

미국의 강경한 대응에 북한은 전군 경비령과 동원령으로 맞섰다. 당시 원산에 거주하던 탈북자 장해성 씨와 박상운 씨는 북한의 대공포가 원산시내와 인근 산악지역에 총집결 했었다고 증언했다. 남한 또한 이미 1.21 사태로 준 전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전에 일어난 1.21사태로 이미 전군 비상 총출동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푸에블로호 통신 감청 업무는 세계 최대의 첩보 기관인 NSA가 통제하고 있었다. 나포 당시에도 오직 NSA의 관심은 푸에블로호에 실려 있던 1톤이 넘는 비밀 기록 파괴였다. 그러나 결국 상당량의 기밀서류와 첨단장비가 북한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미국은 핵전쟁계획까지 세웠지만 곧 협상을 택했다. 이러한 미국의 선택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북한과 미국간의 일대일 비밀 협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던 미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북한과 협상테이블에 마주앉은 것이었다.

북한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회담을 계속 했고, 철저히 비밀을 유지, 남한에게조차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집권 이후, 한일협정 타결과 월남파병으로 한미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돈독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을 배제한 북미 비밀 협상은 남한에게 충격과 분노로 다가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태도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국민 감정도 심각해져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의 반미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남한 정부의 북한 단독보복 시사 발언과 미국에게 전달된 공식적인 항의 각서, 그리고, 월남 파병 철수까지 거론되자 미국 정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남한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미국은 대통령 특사로 사이러스 밴스를 급파, 2월 15일. 1억 달러 군사원조를 골자로 하는 한미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흥분한 남한에게는 1억불의 군사원조를, 도발행위를 한 북한에겐 보복이 아닌 협상을... 도대체 미국은 왜 여느 때와는 다른 자세를 취했던 것일까?

모든 문제는 푸에블로호의 비밀스러운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전자정보탐지함이었던 배 안에는 '소드-헛' 즉, 암호장비와 무선기로 가득 찬 통신감청방이 있었고, 특별훈련을 받은 통신감청요원들이 3중 잠금장치가 된 이 방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

푸에블로호 통신감청 업무의 통제는 NSA(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 이뤄졌다. 이곳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전기전자 신호의 감청을 하는 가장 비밀스런 정보기관이다. 올 4월, 하이난섬에서 일어났던 EP3 정찰기 사건의 배후에도 NSA가 있었다.

NSA는 세 척의 정보수집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배너, 푸에블로와 팜비치였다. 하지만, 정보수집 업무는 NSA가 통제하고 배의 운항은 해군이 책임을 지는 이중명령체계였다. 베일에 쌓인 푸에블로호의 임무로 인해 미국 내에서조차 나포 사건을 둘러싸고 많은 의문이 제기 되었다. 사건 당시 푸에블로호의 존재는 백악관에서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NSA.

배가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 NSA의 관심은 오직 1톤이 넘는 기밀서류와 암호장비의 파괴였다. 결국, 상당량의 기밀서류와 장비가 30명의 통신감청요원과 함께 북한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미국은 11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83명의 승무원의 신병을 인도 받았으나 푸에블로 선체와 기밀서류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사과는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사과 내용을 부인하겠다."

미국의 이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제안에 북한은 합의한다. 북한이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은 하지만 사전에 모든 사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해 어떻게든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던 미국과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확실한 사과문을 손에 쥐길 바랬던 북한의 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1개월 간의 지리했던 협상은 미국이 북한의 영해를 침입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한다는 한 장의 문서로 승무원을 송환하며 끝을 맺는다.

덧붙이는 글 |  '푸에블로 나포사건' 편은 6월 29일(금) 저녁 9:55-10:50 방송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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