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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선일보의 후안무치한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두 소설가의 망발에 가까운 기개(?)를 접하고 얼굴 화끈거림을 감내하며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확대해서 보면 한국 문단의 모든 소설가들에게 망신살을 나누어 준 일이기도 해서, 문단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는 나로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비중 있는 작가들인 데다가 한 사람은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칭호까지 듣는 사람인데 생각하는 것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한국 소설가들의 수준을 알 만하다는 말도 여러 사람에게서 들어야 했다.
그 지경에서 정말이지 나로서는 변변치 않게나마 걸치고 있는 소설가라는 내 명색이 돌연 부끄러워지던 것이었다.
복거일 씨는 어느 정도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서 내가 형님이라고 불러온 분이다. 몇 년 전 어느 전문대학에서 의뢰받은 '개교 00년사'라는 책의 원고 정리 작업을, 내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안 탓인지 내게 돌려 주려고까지 했던 분이다. 그 일은 결국 성사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일을 잘 기억하고 있고, 그만큼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중·단편소설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장편소설에만 집착하는 특이한 창작 태도에 대해서도 나는 일종의 경외감을 가져왔다. 그의 경이적인 작품세계는 오종종한 세계밖에 지니지 못한 나에게 작가로서의 한계와 비애를 절감시키곤 했다.
그런데 몇 해 전 그가 조선일보 지면에 '영어공용어론'을 주창하는 글을 쓴 것을 읽었을 때는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이 중심 없고 무게 없는 세상이야 어쩔 수 없이 영어 숭배주의로 흘러가게 마련인 것을, 그런 판국에 왜 굳이 소설가까지 나서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야속한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민족지'임을 강변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적 자존심이 털끝만큼도 없어보이는 조선일보와 아주 잘 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그가 6월 28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신문과 싸우는 政府」라는 이름의 시론을 썼다. 한마디로 소설 같은 시론이고, 소설과 신문 칼럼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멋대로의 작문이었다.
언뜻 보기엔 유식으로 치장한 듯한 말들이지만, 신문 개혁의 본질과 오늘의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었다. "다른 편으로는 권력의 잘못들을 용감하게 파헤친 우리 신문들이 '금전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프라우다'들로 바뀌는 것은 끔찍한 재앙"이라고 한 말이며, "신문사들의 재정적 바탕을 허물어 독립성을 훼손하는 조치는 아무리 법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언론개혁'의 본질을 해친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라고 한 말에서는 소설가로서의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시야를 전혀 지니지 못한 소아병적인 무지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조악하여 역겨운 날비린내를 맡는 기분이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소설가 이문열 씨는 나와 동갑이다. 동갑인 데다가 같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 출신 작가라는 인연(?)도 있어서 나는 평소 그에 대해 친근한 느낌을 가져왔었다. 1986년 서울의 어느 잡지사에서 단 한번 만난 적밖엔 없지만, 그가 어느 해 MBC 라디오 프로에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했다는 어떤 이의 전언으로 말미암아 은근히 고마운 마음도 지녀왔었다. 이문열 문학의 우람한 크기에 마구 짓눌리는 듯한 외경심과 열등감 때문에 몰래 속절없이 신음을 삼키면서도….
그런데 점차 그에 대해 의아스러운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본색을 알게 되면서 묘한 당혹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작가의 본질과 작품 세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그것의 확인은 나에게 야릇한 실망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지방의 어느 공적인 자리에서 그와 나를 비교하면서 이런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인 이문열이 하늘의 태양이라면 변방의 문사인 나는 풀밭을 나는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딧불이인 내가 태양인 이문열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작가적 양심, 정의감,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 그런 것에 기반한 균형 감각 등에서 나는 단연코 이문열보다 앞선다고 본다. 이것만큼은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눈물을 삼키며 노력한다. 비롯 보잘것 없는 문학이지만 나는 내 작품세계와 나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한다.
내 작품들의 모든 궁극적인 가치들이 내 삶 자체의 최종 목적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이문열의 광대한(?) 문학과 찬란한 명성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작가 이문열과 조선일보는 외형적으로, 속성적으로 너무도 닮아 있다.
우선 그들은 너무 비대하다. 2백40만부를 자랑하는 조선일보의 비대함과 저서들의 총 판매량이 수천만 권에 달한다는 이문열의 그 비대함은 분명히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 일맥상통의 요소들을 일일이 해학적으로 적시해 볼 수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 외형의 비대함은 거만한 태도를 가져오기 쉽고 마침내는 오만한 속성까지 결과시키고 만다. 그들은 속성적으로 오만하다. 자신들의 비대함에 대한 과신 탓이다.
비대함과 거만함과 오만함은 겸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자기 성찰이라는 것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자기 체구 밖의 사물들에 대해서 깔아보는 습성이 있다. 그런 습성과 태도를 일러 방자(放恣)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오만함과 방자함은 곧바로 무모함, 치졸함과 통한다. 자기 덩치만을 믿고 함부로 체신없이 깝죽대는 행위는 무지와 어리석음의 표상이다.
여기에 그들의 한계와 비극이 있다. 덩치에 어울리는 진중함,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 등이 결여되어 있다. 오로지 화석화된 자신의 관념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문열은 자신의 작가적 명성에 대한 겸허함이 없다. 그가 7월 2일자 조선일보에 쓴 '시론'은 너무도 무지하다. 진지함과 고뇌의 그림자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멋대로 되는대로 휘갈겨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제목부터 실소를 자아낸다. 글 전체의 뜻이 너무도 조악하다. 아무리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그렇다 하더라도 '고뇌'를 생명으로 삼는 작가로서 할 소리들인가. 그중에서도 압권인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 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라는 말―참으로 기가막힌 언설이다.
그게 사려 있는 작가로서 할 소린인가. 그런 말을 쓰려면 저 80년대 초 '조중동'을 비롯한 모든 신문 방송이 밤낮없이 전두환 찬양가를 부를 때 썼어야 제대로 말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같은 작가로서 이문열의 그런 실언들에 뼈저린 비애를 느낀다. 아무리 이문열 나름의 관점이요, 주장이라 하더라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그가 지금까지 이룩해온 빛나는 문학 작품들을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그런 유혹까지 감내하는 듯한 기분이다.
오만 방자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이 골고루 뒤섞인 그런 실수의 진구렁에서 이문열이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족(蛇足) 한 가지―.
나는 젊은 시절 김동길 씨의 글들을 읽고 감화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존경할 만한 노인층이 많지 않은 현실을 비애스럽게 생각하면서, 김동길 교수만큼은 수많은 사람이 길이 존경할 수 있는 노인이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오늘의 김동길 씨에게서 추한 늙은이의 모습을 보는 비애 또한 참으로 크다.
조선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아주 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 또한 조선일보의 특징이며, 마침내는 준엄한 심판을 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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