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심재춘과 정명기. 이 둘은 현재 한 방을 쓰는 동거인이다. 단순히 잠만 함께 자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생활이 함께 이뤄지는 동거인이다. 음식도 거의 같고, 접하는 사람이며 사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동거하는 곳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대구시 달서구 달서우체국 사서함 7호

대구교도소 주소다. 심재춘 씨는 이른바 민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약 9개월 전에 서울구치소에서 이곳으로 왔고, 한총련 4기 의장이었던 정명기 씨는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폭력 등의 죄로 약 2년 10개월 전에 광주교도소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며칠 전 이곳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심재춘 씨가 그의 동거인 정명기 씨의 출감을 앞두고 정 씨에 대해 쓴 글이다.

정 씨가 의장을 맡았던 4기 한총련은 이른바 '연세대 사건'을 겪으면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 사건 이후 한총련은 결과적으로 대중성 면에서 하강곡선을 그렸다. 한편, 이 사건 이후 한총련은 '최근의 이른바 한총련 사태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가슴 아프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과 마음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모아나가는 데 실패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씨는 97년 7월 검거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며 오는 8월 3일 만기 출소한다.

이제 겨우 형량의 반환점을 넘은 심 씨는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추신을 남겼다.
"원래 옷 벗고 살 맞대는 사람 사이를 서술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 3자의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어쩌면 며칠 후에 혼자 남게 되었을 경우를 미리 연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심재춘 씨가 보낸 편지글의 전문이다.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불끈불끈 힘이 솟는 이십대 중후반을 고스란히 감옥에 갇혀 지낸 그에게 지난 4년은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웃는다. "삼십년, 사십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장기수 선생님들에 비하자면" 4년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지금 감옥에 갇힌 양심수 중에서 자신이 가장 오랜 징역을 살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나는 안다. 갇힌 사람에게는 단 하루 든 사십 년 이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을.

정명기.
96년 제4기 한총련 의장이자, 이른바 '연세대 사건'의 주인공인 그가 이제 출감을 열흘 앞두고 있다(8월 3일).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는 생각이 많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 그대로 '사는 것'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도 뻐꾸기처럼 제 둥지를 틀지 못하고 산 것은 아닌지 아쉽기만 해요."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곳이지만, 끊임없이 비상을 꿈꾸는 그에게 이 손바닥만한 독방은 결코 보금자리이거나 둥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배웠다. 장기수 선생님들을 감옥에서 만나본 마지막 청년이 된 것도 그에겐 '행운'이었다. 운동의 선배들이 거쳐갔고 후배들이 감옥을 나섰다. 사람들이 "저보다 늦게 와서 먼저 나갔지만" 그네들의 삶이 그에게는 배움의 터전이자 교훈이었다.
"그분들의 삶에서 배우는 것 그것이 공부였어요. 너무 웃자라버린 제 삶을 차곡차곡 다질 수 있었으니까요."

감옥에 배움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곳엔 자신이 풀어야 할 과제도 있다. 물론 과제를 푸는 방법은 '생각'이다. 생각 때문에 시간이 가고 내가 성숙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피곤하고 괴롭다. 그에게 맡겨진 숙명같은 과제는 무엇이었나.

언젠가 감옥 안에서 서로의 죄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거창하게 시작한 논쟁은, 하지만 너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각자의 죄질을 형량이 너무 명확하게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방북(물론 밀입북이었다)대표 2년 6개월. 간첩죄까지 뒤집어쓴 나의 형량은 3년 6개월.

정명기는 5년이었다. '연세대'가 근거가 되었다. 가장 죄질 나쁜(?) 그는 분하다. 그래서 그에게 '연세대'는 줄곧 화두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 그걸 붙잡고 참구(參究) 했겠는가. 쏟아낼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가져다 준 지혜인지 스스로에게 원인을 돌린다. 오랜 사색과 성찰의 결과인지 자기에게서 결함을 찾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여유가 생긴 것일까. 김영삼 정권과 공안 정국과 마녀사냥식 한총련 죽이기라는 분노에 앞서 자신의 부족함과 미숙함을 이야기한다.

"당장에 끝낼 일이 아니라고 봐요. 깊고 넓은 시각에서 차분하게 올바른 평가를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당시의 사람들과 다시 만나야 하겠죠. 어차피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평생 동안 할 거예요."
긴 호흡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에게 그 말보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이 가슴에 새겨졌다.
"(연세대) 사건 이후로는 수배받아 도망다니고, 구속된 이후에는 징역을 사느라고 한 번도 당시의 학우들을 위로해주지 못했어요. 경찰의 폭력과 여론의 질타에 상처받은 학우들을 제 가슴으로 따스하게 감싸주지 못했어요. 그런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한총련의 생명력은 이런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줄기차게 이어진 수배와 구속과 탄압에도 끈질기게 자신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아끼고 감싸는 청년들 특유의 사랑과 열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총련을 지켜준 후배들이 눈물나도록 고맙다. 그 순간은 그 또한 영원한 한총련이다.

여드름투성이의 깨끗한 청년. 출소를 앞둔 그 앞에 과제가 많다. 그 사이 삼십대가 되었고 세기마저 바뀌었다. 세상과 사람들의 정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한총련 의장일 때나 수인일 때나 세상 앞에 선 지금이나 여전히 그 앞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그렇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도 않는다. 긴 고난을 이긴 사람은 최소한 자기 삶에 대한 용기는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들은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를 때와 창공에서 땅으로 막 착륙하는 그 순간 가장 많은 날개짓이 필요하다지요. 지금이 가장 격렬하고 힘찬 날개짓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날아보겠습니다."

의분많은 땅에 평화가 깃든다고 했던가. 참고 견디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낸 그의 앞길에 평화가 찾아들 날은 언제쯤일까. 비워내고 비워낸 그 마음에 다시금 무엇을 채울지. 그건 여전히 그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감옥 생활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필자의 요청으로 심재춘 씨가 작성한 것이다.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 

김경환 심재춘 씨 사면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주십시오. 마음을 보태주실 분은 인권실천시민연대 홈페이지(www.hrights.or.kr)에 마련된 서명란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김경환 심재춘 씨 석방을 위한 서명용지를 보냈더니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핏볼테리아라는 아메리카대륙 태생의 개를 좋아하는데, 이 개는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최소한 비긴다고 하더라."

이번 일에서 비기는 일은 사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이문희 두 사람의 가정을 평상시처럼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일테니까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