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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안동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김경환 씨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정부는 이번 8.15엔 사면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편집자 주)


쏟아지는 빗속을 달립니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세찬 빗줄기입니다. 귀에는 온통 빗소리뿐.

젖은 옷은 벗어던진 지 오래입니다. 참으로 얼마만인지요. 아득한 어릴 적 기억뿐. 벌거벗은 내 몸에 와서 부서지는 수천 수만의 빗방울들. 여윈 내 육신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신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지친 내 영혼을 일깨우는 시원한 입맞춤이 다가옵니다. 이 순간 나는 막 피어나는 꽃 한송이, 환희입니다.

이런 날, 나는 울고 싶어집니다. 빗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장대 같은 빗속을 울면서 달리고, 달리면서 울고…. 나는 비와 함께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요, 과정이며, 방향이기에 비에 젖으며 하염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어제 운동장 담벽 따라 걷다가 목부러진 해바라기를 보았습니다. 지독한 가뭄을 견디느라 채 자라지도 못했는데, 이번 장마통에 여린 줄기가 꺾이고 만 거지요. 어찌 할까 잠시 망설입니다. 그냥 놔 두는 것이 나은지, 부목이라도 대주는 것이 좋은지.

어떤 것이 자연의 흐름에 이로운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늘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목대신 작은 돌을 쌓아 부러진 줄기를 세워 봅니다. 이럴 때 당신은 어찌하는지요?

언젠가 옥창 거미줄에 나비 한 마리가 걸려들었습니다. 처절한 날개 짓 소리가 내 눈길을 끌었지요. 어찌할까 생각하는 사이 나비는 제 힘으로 날아갔지만, 나의 의문은 여전히 남았지요. 나는 마음 속에 한 가지 기준을 정해 봅니다.

'상처입고 곤경에 처한 것들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인간의 길이 아니다. 일단 내가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이미 내 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한다.'

사람만이 자연 속에서 의식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목 부러진 해바라기나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내가 본 것은 우연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兼相愛 交相利'(서로 두루 사랑하고 서로 두루 이로움을 나누라)
묵자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리며, '두루 사랑한다(兼愛)'는 말이 내게는 '겸손해야 사랑할 수 있다(謙愛)'는 말로 새겨집니다. 어린 해바라기가 내게 전해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이 장한 비가 그치고 나면 운동장 여기저기에 청죽(靑竹)같은 풀들이 쑥쑥 솟아날 것입니다. 나는 이미 보았습니다. 비 온 뒤에 창검처럼 거침없이 솟구치는 들풀들의 놀라운 생명력을. 나는 저 강인하고 당당한 풀들의 반란을 지켜보며 존재의 본질과 생명의 신비를 생각합니다.

새들은 왜 노래하며, 꽃들은 왜 피어나는가. 나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 지닌 것들은 죽는 날까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 생애에 걸쳐, 온힘 다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신을 완전히 펼치고 드러내야 생명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냄,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자 생명의 증거입니다. 늘 새로운 세상, 드넓은 세계를 꿈꾸는 당신. 갈수록 푸르름을 더해 가는 저 빛나는 소나무의 자태를 바라보는 내 심정이 어떤 줄 아십니까.

나는 부럽고… 참담해집니다.
나도 저렇게 '커밍아웃'하고 싶습니다.
나도 저렇게 전 생애를 걸고 온전히 나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물론 종교를 따로 정해놓고 살아가지 않는 나에게 감옥은 나름대로 괜찮은 수도원이자 불도량이자 아쉬람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기도와 성찰과 침묵을 배웁니다. 나는 이곳에서 최소한의 정량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힙니다.

철마다 한 벌의 옷과 0.75평의 공간과 하루 세끼 보리밥과 야채, 전등 한 개의 에너지로 충분합니다. 또한 나는 이곳에서 모욕을 참는 법과 긴 시간 기다리는 법과 자연과 하나되는 법을 받아들이며 점점 둥글어지고 낮아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한 것인지, 이 척박하고 협소한 공간에도 하늘소, 풍뎅이, 소금쟁이… 밤하늘의 별과 푸른 하늘이 빠짐없이 자리한 것에 나는 진실로 진실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은혜와 축복과 수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의 전 시간을 당신의 하루와 감히 견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당신의 하루는 자위(自爲)이지만, 나의 전 시간은 어쩔 수 없는 타위(他爲)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한백, 김광수, 관모봉, 3000번….
냉전의 고치를 벗고 이제 나는 그냥 태어난 그대로의


환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존재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내 본성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나는 남은 생 동안 이러한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정말이지 나는 더 늦기 전에 ‘커밍아웃’해야 합니다.
우울한 시대의 껍데기를 벗고, 한 마리의 당당한 성충으로 자유롭게 비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존재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당신에게 드리는 나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래요.
오늘은 비가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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