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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봄부터 나는 파월 지원을 결심하고 지원 신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월남 참전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지만, 한때는 내가 파월 장병 ―월남전 참전 용사였다는 게 꽤나 자랑스럽기도 했지요. 괜히 어깨가 으쓱거려질 정도로….
그러나 월남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반추하면 할수록 월남전 참전이 개인적으로도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못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은 미국의 용병(傭兵)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과 그래도 우리의 용병 노릇이 6, 70년대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은 내 가슴에 묘한 쌍곡선을 그려놓는 것입니다. '수치'와 '긍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쌍곡선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쌍곡선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대다수의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이 쌍곡선의 갈등을 가슴속에 명확히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고는 대부분이 단세포적인 생각으로 참전 용사로서의 긍지만을 한껏 키워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글에 벌써 동원된 '용병'이니 '수치'니 하는 단어들에도 민감하게, 어쩌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내게 몹시 분노를 표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그런 분노는 이미 한차례 극렬하게 표출된 바 있지요. 한국군이 월남에서 저지른 갖가지 크고 작은 '만행'들을 우리 스스로 조사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참회와 함께 베트남 국민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겨레 21>에서 나왔을 때, <월남참전군인회>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보여 준 즉발적이고도 험악한 태도는 참으로 놀랍고도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수많은 회원들이 <한겨레> 신문사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기자들을 폭행한 일―그게 벌써 재작년 가을의 일인가요?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논의를 인류 공동선을 창출하기 위한 가치 지향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월남전 참전 용사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만 간주하는 그런 단세포적인 사고와 군중 심리도 함께 하는 폭력들을 보면서 참전 용사들 중의 한 사람인 나는 정말이지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지는 절망 속에는 우리 민족의 분명한 약점의 하나인 단순성, 스스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버릇, 대중 심리가 결부되면 신속하게 뭉치고 동물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속성 등에 대한 뼈아픈 통찰도 함께 껴들어 있지만….
그때 <조선일보>의 기분은 어떠했을지 또 괜히 궁금해지는군요. 나는 당시에 <한겨레>의 수난을 지켜보면서 조선일보를 많이 의식했었지요. 그들은 지금 너무도 고소해서 기분 째지는 상태일 거야.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후안무치한 조선일보가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 그때의 내 생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하는 기분입니다.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언론 개혁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운동을 대하는 그들의 방약무인하고도 후안무치한 행동을 보면 모든 것을 훤히 짐작할 수가 있으니까요.
하여간 나는 참전 단체의 그런 분별 없는 행동을 본 뒤로는 그 단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삽니다. 지역에서 살다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런 저런 단체 활동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월남참전군인회>의 태안군 지부(태안읍 분회)에도 회원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임이나 행사 등에 적극 참여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나는 31년 전인 논산훈련소 조교 시절 월남에 가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한번 지원 신청을 했는데 특명이 나지 않아서 그것도 경쟁이 심한가보다는 생각으로 '뇌물'을 쓸 궁리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집에 간곡히 부탁하여 (월남에 가려는 뜻은 우렁이 속처럼 감추고) 3천원을 송금받았지요. 그리고 그 돈 ―거금 3천원을 연대본부 인사과 의 담당 병장에게 '인사 청탁 뇌물'로 주었습니다. 표현이 너무 거창한가….
30여 년 전의 3천원이라는 금액의 가치를 지금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군요. 그래도 부정확하게나마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있습니다. 지금 이곳 태안의 대포집에서 1천원을 받는 막걸리 한 사발 값이 그때는 5원이었으니….
아아, 내 생애에서 '뇌물'이라는 이름의 돈을 써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살 날이 꽤(?) 남았으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뇌물'이라는 이름의 돈을 또 쓰게 될지도 모르므로 현재 상태만을 놓고 '후무'라는 말까지 쓸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아아, 나도 '뇌물'이라는 이름의 돈을 써본 적이 있는 위인입니다. 그것도 인사 청탁 목적으로….
생각하면 아이들 담임 선생님들과 피아노학원 선생님께 명절 때마다 과일 상자를 내가 직접 어깨에 메다 드린 적은 여러 번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까지 뇌물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상의 삶을 좀더 푸근하고 맛갈스럽게 만드는 소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내가 가난한 집으로부터 송금을 받아 무려 3천원이나 거금을 썼는데도, 파월 특명이 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내리 두 번이나….
그러니까 나는 벌써 내리 세 번이나 파월 지원이 무산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내가 퉁퉁 부은 얼굴로 불평 겸 항의를 하니까 연대본부 인사과의 그 아무개 병장이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나두 참 이상하다. 일껏 기안을 해서 과장님 결재를 받아가지고 연대장님께 올리는데, 연대장님 결재 선에서 너만 번번이 빠꾸를 당한다 말야."
"그럼, 연대장님이 파월 특명 결재를 허면서 나를 뺀단 말유?"
"그렇다니께."
"그류이잉?"
나는 영문을 모르는 가운데서도 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기는 했습니다.
"연대장님이 월남에 갔다 오신 분이라서 그러나…."
"연대장님이 월남에 갔다 오신 분이래유?"
"월남에서 대대장을 하고 오신 분이거든."
"그류이잉?"
"그래두 그렇지, 왜 너만…."
"그러게 말유. 내가 연대장님허구 워치게 되는 사이두 아닌디…."
"그건 그렇구, 넌 도대체 뭣 땜에 월남에 가려구 그렇게 애를 쓰냐? 차출에 걸린 어떤 놈들은 반대로 월남에 가지 않으려구 별 지랄을 다 허는데…."
"내가 죽을라구 환장을 해갖구 이러는 건 안유."
"그래도 넌 월남에 가면 죽을 수가 있어. 니가 줄이 있냐, 빽이 있냐? 월남에 갔다 하면 말단 소총중대 전투병일 텐데, 정글을 박박 기다가 깨질 수가 있단 말야."
"그래두 난 꼭 월남에 가야유. 이왕 삼년 세월을 군대 속에다 처박구 사는 눔으거, 돈이라두 벌면서 고생을 허야니께유."
"이 훈련소 조교 생활이 그렇게 고생스럽냐? 전방에 비하면 느이 집 안방에서 군대 생활을 하는 셈일 텐데…."
"꼭 그런 것만두 아니유."
그 순간 나는 논산훈련소 말단 교육중대 조교 생활의 애환이랄까, 갖가지 사연들이 주마등같이 떠올랐으나, 연대본부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인사과 행정병에게 그런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또다시 '돈'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이미 예전에 작가가 될 꿈을 안고 나 홀로 문학 공부를 하고는 있었지만,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경험 세계 확충' 따위 고급스러운 의지 때문에 월남에 가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월남에 가면 받게 되는 매월 몇십 달러의 전투 수당이 최대의, 아니, 유일한 목적인 셈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용병'이라는 단어를 내 머리속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목적인 이상 나는 이미 용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매우 불유쾌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요.
그래도 나는 월남에 가고픈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기필코 월남에 가야 한다. 그래야 월남에 가기 위해 이 인사과 행정병에게 뇌물로 먹인 거금 3천원 ―내 아버지 어머니의 피땀 어린 돈도 벌충할 수가 있을 것 아닌가!
나는 다시 한번 굳게 결심하고 좀더 결연한 소리로 연대본부 인사과 아무개 병장에게 짱을 놓았습니다.
"한번 더 기안을 헤서 올려 주세유. 다음번 기안은 원제 올린대유?"
"요새는 파월 장병 공급이 달리는 모양이야. 매월 올리게 되더라구."
"그럼, 다음번 기안에두 날 꼭 좀 넣어주세유. 만약 그때두 연대장님헌티서 빠꾸를 당허면, 그때는 지가 직접 한번 연대장님을 찾어뵐라그류."
"뭐? 너 같은 쫄병이 어떻게…?"
"연대장님 따까리가 내 따블 빽 동기잖유?"
"그래두…. 완전히 간땡이가 부었구나?"
"간땡이가 빵구 나두 좋유. 내 월남에는 꼭 가야니께유. 그럼, 재삼 부탁허겄슈."
그리고 중대로 돌아온 나는 그때까지 비밀로 했던 파월 지원 사실을 과감하게 중대 기간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것은 곧 월남에 갈 사람이니 쫄병 구박 좀 그만 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일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나는 특명을 기다리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이나 내리 연대장의 결재 선에서 물을 먹었으니, 설마 네 번째 지원까지 연대장이 X를 놓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대장님이 나를 부른다는 전갈이 중대본부로 내려왔습니다. 연대장실 따까리 신 일병의 그 전갈을 내게 전해 주는 중대 선임하사의 표정에는 약간의 경이감 같은 것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약간의 경이감은 연대장실 따까리 신 일병의 표정에도 살풋 어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자를 벗고 약간의 대머리를 보이며 앉아 있는 연대장이 내게 월남에 가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월남에 가서 받게 될 돈 ―전투 수당은 미국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용병'이라는 단어가 또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내 어조에 비장함이 실렸는지도 모릅니다.
연대장이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내가 월남에서 대대장을 하고 와서 월남 실정을 잘 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너를 월남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월남에 꼭 가고 싶어하는 데다가, 나도 국방대학원에 입교를 하게 되었다. 나도 특명을 받아서 더 이상 너를 붙잡아둘 수가 없게 돼서 결재를 했다. 월남에 가면 말단 전투중대로 가게 될 확률이 거의 절대적이니까, 각별히 몸조심하기 바란다."
그리고 연대장은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었습니다. 그 지갑 속에서 천원짜리 석장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다만, 월남에 가는 동안 용돈으로 쓰거라."
나는 그 돈을 받으며 손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연대장실을 나오는데, 내가 월남에 가기 위해 인사과 사병에게 뇌물로 준 돈과 연대장님이 내게 용돈으로 준 금액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일순 신기하게도 느껴졌습니다.
2001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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