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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해마다 8월 17일이 되면 남다른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날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군요. 오늘은 바로 장준하 선생이 서거한 날입니다.
제 또래 세대들에게 장준하라는 이름은 낯섭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상당수 국민들에게도 해당되는 낯설음이지요. 모 잡지가 건국 50주년의 아웃사이더들중 하나로 꼽을 만큼 장준하 선생은 주류의 무대에는 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주류가 일제부역에서 개발독재로 이어지는 궤를 가졌다면 말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한 김영삼 김대중 씨는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까지 했습니다만, 선생은 그에 비하면 비주류중에서도 비주류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결코 그를 구석에서 사라져간 인물쯤으로 기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제부역-독재의 궤가 있다면 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민주의 궤 역시 존재합니다. 선생은 명실상부한 저항의 주역이었습니다. '재야 대통령', '박정희의 천적'이라는 별명은 이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저항 정신의 고향이자, 박정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 시작하는 지점은 광복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선생이 광복군에 입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한때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지요. 이것은 선생이 십년 연하의 제자와 결혼한 사연과 밀접합니다.
정신대 징용을 포함한 일제의 압박은 아내 김희숙 여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고 선생은 과감히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에 이어 자원하여 일본군에 들어갔던 것이죠. 선생과 박정희는 교편을 잡았고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속사정은 무척 차이가 있겠습니다. 또한 그 차이가 향후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육천리 장정을 거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달한 선생. 그는 거기서 정신적 스승이자 지주랄 수도 있는 백범 김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선생에 걸맞는 광복군의 옷을 입고 O.S.S. 작전에 참여합니다.
이 작전은 국내에의 침투를 목적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예상 생존률은 1할이었다지만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해방 후 자주 국가를 세우는 데 일조하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때이른 항복으로 안타깝게 수포로 돌아가지만 광복군 장준하는 많은 자산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군내에서 발행한 <등불>은 훗날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엿보게 하는 잡지지요.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을 하는 도중에 선생은 박정희와 최초로 마주칩니다.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일제가 패망하자 광복군에 편입된 것이었습니다. 선생이 반성의 기미가 없는 박정희를 야단쳤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만 그것이 숙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둘은 내내 상반된 길을 걷습니다. 선생은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을 맡았습니다. 전쟁 중에 선생이 저 유명한 <사상계>를 창간했을 때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습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이승만 정권 말기에 한번 더 기도하지만 민주혁명으로 무산됩니다. 민주혁명은 자유민주주의의 필봉을 세워 온 <사상계>가 거둔 결실이었고 박정희에게는 더 없는 좌절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2공화국이 출범하고 과도기적 혼란과 정권 내의 갈등이 심각할 무렵, 선생은 국토개발 사업 구상에 골몰합니다. 이는 경제제일주의를 내걸고 난국을 타개하려던 장면 내각이 선생에게 손을 내미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맞춰 5.16의 총성이 울립니다. 그것은 곧 장준하 선생과 박정희의 본격적 대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친미반공 노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장준하 선생은 일시적으로 강력한 반공색채의 박정희의 등장을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박 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자 선생은 정면으로 맞섭니다. 박 정권은 이에 '부패언론인'이라는 꼬리표로 응수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선생은 '막사이사이 언론인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선생이 이끌던 <사상계>는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들의 필독서였고 발행부수 또한 엄청났습니다. 오죽하면 일간지인 조선일보를 능가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아시아의 4대 잡지'로 꼽히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도전과 응전. 어느 역사만화책의 소제목입니다. 그처럼 선생과 박 정권의 충돌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겁니다. 근대화의 영웅으로 매김하려는 박정희에게 선생은 '밀수 왕초'라는 과감한 규정을 내렸습니다. 결과는 투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굽히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급기야 옥중에서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야당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 내는 등의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그의 광휘는 재야에서 가장 강렬히 빛났습니다. 사실 재야(在野)라는 용어도 선생이 다른 몇몇 운동가들과 함께 지은 이름이지요.
72년에 선생과 박정희는 도전과 응전을 잠시 멈추기도 있습니다. 최후로 말이지요. 갑작스레 남북화해 무드를 연출한 7.4공동성명에 선생이 지지를 밝힐 것입니다. 박정희도 공직을 제의하면서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으나, 선생은 박 정권하에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의사를 피력하면서 사양했다고 합니다.
석달이 지나서 두 사람은 다시는 좁혀지지 못하게 멀어집니다. 선생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끝나고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킵니다. 유신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듬해 12월, 선생의 주도로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나기에 이르릅니다.
75년 오늘 선생은 약사봉 등산길에서 서거합니다. 추락사라고는 하지만 선생의 주검은 그런 손쉬운 결론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졌다고는 볼 수 없는 주검이었습니다. 세인들은 '의문의 추락사'라고 일컫지요. 김재규 씨가 선생의 장남에게 했다는 "자네 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는 말도 귀 기울일 만합니다(김씨는 선생의 인품과 능력에 탄복하여 그 가족들을 돌봐왔다고 합니다).
어쨌든 선생이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박 정권이 극단적인 수단으로 대응한 것이라는 설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창설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단순 추락사'가 아님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향적이지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해방 공간에서 강한 우익 성향의 단체에 있었다". 하지만 선생을 폄훼하고 외면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실패한 우리 땅에서 선생은 단연 귀중하고 진정한 우파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 틀을 뛰어넘은(백기완)" 분입니다.
월간 <사상계>가 인터넷 공간에서 부활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암울한 군사정권하에서 지성의 횃불을 밝히던 사상계를 현재의 젊은이들도 많이 읽어보게 되길 바랍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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