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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3국'하면 떠오르는 우리나라의 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이율곡 선생의 '나도밤나무' 이야기. 이 이야기는 뭐 다들 아는 이야기니까 구차하게 무슨 이야기인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밤나무야, 나는 왜 안 세냐..."하고 외치며 굳세고 억센 밤나무들 사이로 뛰쳐나오는 작고 왜소하지만, 용기 있는 밤나무 이야기.
유럽은 작다. 그러나 굉장히 넓은 동네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하고, 지구상을 휘젖고 다니며, 현재 전세계문화를 포맷시킨 거대한 동네이다. 각자 다른 역사와 문화, 언어를 가진 작은 나라들이 서로 어깨를 맞닿아 모여 있는 곳.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럽은 으리으리한 건축물과 화려한 궁전과, 쭉 뻗은 대로와, 그리고 자유스러운 낭만 그런 것들이 가득찬 곳이지만, 나는 그런 유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유럽에서 폴란드 너머 서쪽으로는 한국 가는 비행기 갈아타는 파리, 프랑크푸르트 공항 등 외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것도 그 이유가 된다).
내가 아는 유럽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고, 생존을 위하여 역사 내내 투쟁을 해야만 하고, 침략당하고 슬픈 일을 겪고, 우울한, 그런 곳이다. 내가 아는 유럽은 우울하고, 쓸쓸하다.
발트3국도 엄연히 유럽문화의 한 부분이다. 슬라브, 스칸디나비아 등 유럽 주류문화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화와 감히 비교할 수 있는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와, 슬라브어도 아닌, 게르만어도 아닌, 스칸디나비아어도 아닌 발트어라는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이 나라들도 엄연히 유럽이라는 밤나무 밭에서 자라고 있는 '나도밤나무'인 셈이다. 이 나라도 이제 율곡 선생의 그 밤나무처럼 '나도 밤나무야, 나는 왜 안 세냐?"하고 세계의 무대로 뛰쳐나왔다. 그 밤나무들은 바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세 나라이다.
발트해는 '하얀 바다?'
발트해는 덴마크로부터 시작해서, 독일, 폴란드, 발트3국,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감싸안고 있는 바다이다. 그 동안 영어식 표현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발틱해'란 이름이 더 익숙해 있던 게 사실이다. 왜 발틱해가 아니라 발트해가 되어야 하는가.
일단 발틱의 접미사 '-ic'는 형용사를 만들어주는 영어접미사이므로, 우리말 표현에 억지로 집어넣을 필요는 없고(영어가 세계 중심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말엔 명사 두 개로 새로운 단어를 만들 때, 명사 두 개만 이어쓰면 되지 구차하게 형용사형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들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지, '한국적 말','한국의 말','한국성 말'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발트3국 '대다수' 사람들이 부르는 그 바다 이름엔 공통적으로 'balt-'라는 어근이 들어간다.
리투아니아어로는 'Baltijos Jura', 라트비아어는 'Baltijas Jura'로 불리우고 있는데, balt-라는 어근은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로 '희다(리투아니아어 baltas, 라트비아어 balts)'라는 형용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이다. 그럼, 발트해란 정녕 '흰바다'란 말인가?
발트해 연안에 가보면, 정말 그 바다가 하얗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맑은 초록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약간 뿌연색. 소련시절 공업시설의 폐류가 발트해로 무단방류된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수영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닌 곳으로 찍혀있기 하지만, 그래서 물빛이 희지는 않을 것이다. 높은 파도는 치지 않으면서 항상 찰랑찰랑 낮은 물보라가 뿌연 거품을 내뿜는 바다가 발트해다.
바다 물빛이 어떻든 간에, 그 바다 이름은 물빛과는 많은 연관이 없다. 발트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다른 두 나라와는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를 사용)에서 사용하는 발트해의 이름은 Laanemeri(앞 두 a 위에 독일어의 움라우트 표시가 있음). 말을 직역하면, '서해'이다.
에스토니아 서쪽에 있으므로... 독일에서는 '동해'라고 불린다. 그래서 한국에서 출판된 한 동유럽 전문여행책자에서는 발트해의 이름을 동해로 표기한 어이없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독일지도를 많이 본 모양이다.
덴마크나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어로도 발트어는 '동해'이지 '하얀바다'가 아니다. 폴란드어로는 'balt'와 음가가 비슷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 희다는 말과는 관련이 없다. 라트비아어로도 '흰바다' 이외에 '큰바다'라는 뜻의 다른 단어가 동시에 쓰이고 있다.
'발트해'란 말은 라틴어로 'Mare Baticum'에서 나왔고, 그 어원은 발트해가 허리띠처럼 길기 때문에, 당시 '허리띠'라는 단어의 음가에서 차용된 단어라고 한다.
발트해에 접해 있는 나라가 단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3국만은 아니련만, 왜 이 나라들만 발트3국으로 통하는 것일까? 사실 발트3국이란 공식명칭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발트3국 지역에 '3국'이 등장한 것은 겨우 20세기에 들어서이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내막은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겠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발트해안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비교적 큰 육지를 점하고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바다쪽으로 치우친 모습을 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와 비교해 보더라도 그렇고, 가까운 폴란드와 비교해 봐도, 발트3국은 다 합쳐봐도 폴란드 영토의 반 정도 밖에 안된다. 세 나라의 영토를 합해봐야 우리나라 남북한 합친 정도보다 작으니. 그 나라가 바다를 향해 정말 딱 붙은 형상이다.
크기도 거의 비슷하고, 그 사람들의 문화 역시 비슷해 보이고, 또 주위에 있는 다른 국가들과 언어 또한 달라, 그 셋을 뭉뚱그려 말하기에 가장 편한 것이 이 바다 외에는 특별히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이제 그 발트3국 이란 표현은 거의 고유명사가 되었고, 발트3국 역시 자신의 나라를 '발트3국'이라 부른다. 자신들이 부르면, 뭐 더 이상 왈가왈부 이유가 필요없다.
이 발트3국이 다른 밤나무들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자랐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유럽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 같이 여행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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