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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톨릭다이제스트> 2001년 9월호 '9월의 테마―바보 같은 사랑' 란에 발표한 글입니다만, 내용을 좀더 보충하고 다듬어서 인터넷 세상에 띄웁니다.
주일 새벽마다 해미엘 간다.
오늘도 새벽 5시에 아내와 함께 해미엘 갔다. 태안읍에서 해미까지는 70리, 30분 거리다. 오늘은 아침 미사에 전례 봉사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저녁 미사 전례 봉사자께 부탁하여 시간을 바꾸었다. 그런 일이 벌써 여러 번인데, 앞으로는 나를 주일 아침 미사 전례 봉사자로 넣지 않도록 전례분과위원장께 단단히 부탁을 해야겠다.
목적지는 해미 '무명순교자성지'.
가는 이유는 물을 긷는 일.
물통은 내 12인승 승합차 가득, 20개도 넘는다.
우리 성당 사제관과 수녀원과 사무실을 포함하여 도합 15집이 먹을 물이다.
해미성지에서 솟아나는 물은 일등급 물이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마시는 물이기에 서산시청에서 수시로 수질 검사를 하는데, 변함없이 전혀 오염이 되지 않은 깨끗한 물인 데다가 '약약수(弱藥水)란다. 먹는 물로는 가장 적합한 물이라는 것이다. 물맛이 좋은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고….
해미성지가 심산유곡도 아닌데, 어째서 거기에서 나는 물이 약수일까?
이런 나의 의문을 해미성지 사무장인 김상묵 아우님이 멋지게 해결해 주었다.
"옛날 대원군 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곳이 아닌감유? 그분들의 몸에서 육수(肉水)가 흘러서 약수가 된 거지유 뭐."
이 기막힌 해설에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해미성지 물을 '사수(四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성지에서 나는 물이라는 뜻의 성수(聖水), 순교자들의 몸에서 흐른 물이라는 뜻의 육수(肉水), 수질 검사 분류상의 약약수(弱藥水), 살아 있는 물이라는 뜻의 생수(生水)―이 4가지 성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사수를 70리 지척에 두고 어찌 마시지 않고 살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나만 마시며 살 수 있겠는가.
해미성지 물을 길어다가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며 산 세월이 벌써 6년을 헤아린다. 1996년 가을부터이니….
그전에는, 몇 년 전부터 더 먼 곳인 '태암석산'이라는 곳에서 물을 길었었다. 그 고생을 우연히 알게 된 해미성당 사무장 김상묵 아우님이 해미성지 안에 있는 자기 집 물을 얘기해서 그때부터는 그집 울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집 먹을 두세 통만 긷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 간격으로 가서 30분 이상 전기를 쓰며 20여 통의 물을 길으니, 보통 미안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집의 노할머니며 자매님이며 아이들이 너무 정답고 사랑스럽고 해서, 내 어머니께서 거의 매번 내가 빈손으로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시곤 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정들었던 그 집이 해미성지 재개발 종합 계획으로 지난 5월 헐리게 되어 어찌나 섭섭하던지 나는 「변하는 것은 슬프다」라는 시도 한편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신부님의 특별 배려로 성지 취사장 옆에서 물을 긷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너무 적막하고 슬퍼져서, 사무장 집이 아닌 곳에서 물을 긷게 된 때부터는 매번 아내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공주영상정보대학에 출강을 할 때는 매주 목요일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물을 긷곤 했는데, 문예창작과가 방송극작과로 바뀌어 출강을 그만둔 뒤로는 매주 주일 새벽마다 그 공사를 하게 되었다. 또 그 바람에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가 주일 아침에도 늦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불평을 했다.
그런 아내를 위로하며 내가 주절거린 말.
"이런 일에도 하느님께서 분명히 점수를 따져 주실 것 같은디, 나 혼자만 점수를 받는다는 게 일심동체인 당신헌티 너무 미안허더라구. 그래서 당신도 점수를 받게 헐라구…."
"아이구, 너무도 고마워서 눈물 매렵네유."
하는 아내에게 내가 또 한마디 왈.
"가만히 생각허니께 나는 이중으로 점수를 받겄더라구. 기본 점수에다가 이렇게 마누라를 배려한 것에 대한 보너스 점수까지…. 흐흐흐."
그러자 아내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태안에 와서 열다섯 집들에 물을 나누어 주고 (어떤 집은 2층에까지 올려다 주고) 집에 도착한 다음 나는 차 안 바닥에 고인 물을 걸레로 훔쳐내면서 조금은 걱정을 했다. 지난해 여름 차를 바꾸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서…. 먼젓번 차를 폐차 처리하려고 할 때 누가 달라고 해서 일전 한푼 안 받고 주었는데 글쎄, 차를 고치려고 보니 차 바닥이 온통 다 썩어서 그만 포기하고 폐차 처리를 했노라는 말, 그 말이 생각나서….
물 먹은 걸레를 꽈악 꽉 비틀어 짜면서 차 바닥에 고인 물을 애써 훔쳐내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 이제 그만 물통 좀 줄이라구 헤싸두 말을 안 듣네."
소용없는 말임을 잘 알면서도 또 그러시는 어머니….
물통을 잘 닦고 말려서 토요일만 되면 우리집 앞에 갖다놓는 집들도 있지만, 어떤 집들에는 매번 전화를 하거나 내쪽에서 물통을 가지러 가야 한다.
그리고 대개는 내 돈으로 구입한 물통들인데, 많은 집들이 속뚜껑을 잃어버리거나 잘 챙겨서 내놓지를 않는다. 요령껏 물통 가득 물을 채우지 않아도, 물통의 속뚜껑이 없으니 흔들리는 차 안에서 물이 샐 수밖에….
차 바닥에다 마른 수건을 여러 장 깔아도, 차 바닥의 장판 밑으로 물은 스며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구입한 지 일년밖에 안된 지금의 차도 먼젓번 차처럼 바닥이 썩어갈지 모른다. 바닥 장판이 쉬이 닳을 것은 물론이고….
낮에는 시내가 너무 복잡하여 차량 통행이 한산한 새벽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매주일 새벽마다 늦잠도 못 자고 70리 밖에서 물을 길어다가 멀고 가까운 열다섯 집을 돌며 나누어 주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 좋은 물을 내 집만 먹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죄를 짓는 짓일 것만 같아서, 죄를 짓지 않으면서 하느님 점수도 좀 딸 심산이긴 한데, 때로는 내가 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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