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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미나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던 11일 밤 11시. 한 언론사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기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미국이 최악의 테러를 당했다"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전화를 통해 들은 얘기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워싱턴의 백안관과 펜타곤도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TV에 비친 화면을 보면서 이번에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최첨단 파괴공법을 사용한 것처럼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이 무너져내리는 장면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인간이 아닌 외계인의 공격으로나 가능한 얘기로 비쳐왔기 때문이다. TV를 보며 볼을 꼬집고, 뺨을 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시 행정부와 미국 언론은 물론 세계 각국과 테러리스트들의 반응 역시 즉각적이었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고위 관료들은 "이번 사건은 테러리스트의 소행이 분명하다"며 철저한 색출과 보복을 다짐하고 나섰고,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이슬람 계열의 테러집단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반미 성향의 테러집단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건 발생 직후,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이전에 테러 사건이 벌어지면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것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건 발생 12시간 전의 만남
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이 벌어지기 12시간 전에는 미 국무부와 국방부의 고위 관리를 만났다. 미 대사관이 6명의 한국 NGO 대표를 초청해 비공개로 마련한 이 자리에는, 국무부 미사일방어체제(MD) 설명단 대표와 국방부 산하 탄도미사일방어기구(BMDO) 국제관계 소장이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이들은 MD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한국측 NGO 대표들은 MD의 '위험성'을 들며 이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번 테러 사건과 관련해서도 미국측 대표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미국의 돈과 기술을 가지고 미국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미국의 권리"라며 MD를 문제삼고 있는 한국 NGO들에게 불쾌감을 나타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BM 조약을 넘어 미국 정부가 미국 국민을 보호하려고 MD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미국의 권리라는 말은 일면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핵무기를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격용 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에 대응해 북한이 미사일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북한의 권리이다. 당신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는 것은 북한의 이러한 주권 행사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을 포함해 많은 세계인들이 MD를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이번 테러 사건은 부시 행정부가 그토록 위협을 강조하던 '미사일'이 아닌 '여객기' 공격으로 발생했다. 아무리 완벽한 MD가 만들어져도 이번 사건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상 미국 본토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이번 '여객기 테러 사건'은 역설적으로 '절대안보'를 추구해온 미국의 안보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주만 공격'과 다른 점
사상 유래 없는 피해를 입은 미국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로 보인다. 더구나 여객기가 공격한 건물은 세계 경제의 중심인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워싱턴의 '펜타곤'이 아닌가? 이로써 미국은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본토 방어'를 신국방정책의 근간으로 내세워온 부시 행정부의 자존심도 크게 상하게 됐다.
흔히 이번 사건을 '제 2의 진주만 사태'라고 부르지만, 진주만 사건과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미국이 최초로, 그것도 엄청난 피해를 '본토'에서 당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의 '배후'가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결국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종결됐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배후가 불명확한 만큼 미국이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아랍권의 반미성향 국가들과 단체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보복을 당할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로서도 분노와 충격에 휩싸인 미국 국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고강도의 보복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힘에 의한 평화'와 '강한 미국'을 주창해온 부시 행정부가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고 나올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에 걸쳐 미국과 반미진영간의 '피의 보복'이 악순환될 개연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우려를 낳게 한다. 특히 "일부 아랍권 국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는 보도는 미국 국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철저한 보복'과 함께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본토 방어 및 테러 예방책을 제시해야 하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이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4년주기 국방정책 재검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선 부시 행정부가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비용과 기술력을 투입해 추진하고 있는 MD가 추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MD는 기본적으로 '본토 방어' 및 '예측할 수 없는 위협에의 대응'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MD 구축을 최우선적인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MD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MD 무용론'도 제기될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미국이 직면한 위협은 탄도미사일보다는 비행기, 선박, 트럭, 가방 등을 이용한 원시적인 테러에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MD보다는 테러 예방책에 예산을 우선적으로 투입하자는 의견이 미국 내 일부에서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는 소수에 그칠 것이다.
문제는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팽팽히 맞서 있는 북한이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 국가'와 '대량살상무기 주범'으로 찍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여객기 테러 공격에 원자탄이나 생화학무기가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테러 및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북한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로서는 돌출 변수를 만난 것이다.
더구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군사력 행사를 통해 막겠다는 대확산(counter-proliferation)을 신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포함한 일부 반미성향 국가들의 대량살상무기 시설을 선제공격을 통해 제압하겠다고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분노에 찬 포효에 세계는 숨죽일 수밖에 없고,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도 알 수 없다. 크게는 세계 평화 및 경제에도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며, 작게는 용산미군기지를 지나는 출근길 시민들의 지각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파장은 우리 개개인에도 엄청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 이어질 기사 : 되돌아보는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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