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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자그마하다. 어른 손바닥 하나로 덮을 수 있는 크기가 그렇고 그 안에 담긴 사진과 글자, 그리고 숫자들이 그렇다. '뒹굴이 빈이네'라는 귀여운 제목 아래 '2002'라 찍힌 작은 숫자가 달력의 겉표지임을 말해준다.

맨 아래엔 엄마 아빠의 이름과 연락처가 자잘하게 박혀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 '송편웃음'을 웃는 아기와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달력의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빈이(이강빈)는 2000년 11월 20일 예정일에 정확히 맞춰 3.5킬로그램으로 태어난 아주 건강한 아들이에요. 빈이는 부모성 함께 쓰기를 했는데 아빠의 성(이)과 엄마의 성(강), 그리고 이름은 할머니 성(빈)을 따서 지었답니다.... 지치지 않고 뒹굴고 놀아서 '뒹굴이'..."

내가 '뒹굴이 빈이네'를 선물로 받은 건 열흘 전 일이었다. 강김지숙(33) 씨가 첫 아이의 돌잔치 소식으로 작은 달력을 내밀었을 때, 함께 있던 아줌마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감탄했다.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야!"
"세상에! 이렇게 깜찍하고 예쁜 달력이라니!..."

그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두고 볼수록 그 속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선물이었다.

겉표지를 넘기면 빈이의 지난 1년이 한 장 한 장, 열두 장 달력으로 펼쳐진다. 엄마가 쓴 육아일기가 사진과 함께 첫돌을 맞는 빈이의 역사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1월엔 배냇저고리의 빈이가 잠자는 모습으로 실려 있고 엄마는 이렇게 쓰고 있다.

'태어난 지 이틀째,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잘 빨지 않으려 하지만 기분이 참 묘하다. 빈이가 그 작은 입으로 내 젖을 빨 때의 느낌은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나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생명이 있다는 거창한 생각이 아니더라도, 내 온몸에 전해지는 그 짜릿함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다.'

7월이 되면 빈이는 자기 바지를 머리에 쓴 재미난 모습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다. 7개월을 막 넘긴 빈이가 노는 '짓이' 얼마나 이쁜지 엄마는 놓치지 않고 기록해뒀다.

"아야, 이놈의 자슥, 뭐하나 했더니 아빠 다리 털을 뽑고 있어. 이놈의 자슥이, 아빠 아프단 말이야.".... 한 번 잡아뜯고 아빠 비명소리에 아빠 한 번 쳐다보고 씩~ 웃어주고, 또 잡아뜯고 있다. 빈이 아빠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이쁜놈, 이쁜놈' 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11월, 걷다가 탁자를 잡고 쉬는 빈이가 카메라에 잡혔다. 빈이가 세 발짝이나 걸은 역사적인 날의 일기를 읽자니 엄마아빠의 흥분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빈아, 걸음마 해볼까? 이제 엄마한테 와야지?"
손을 내민 순간, 엉거주춤한 상태로 한 발, 두 발, 세 발을 걷고는 거의 슬라이딩을 하며 내 품에 안겼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일시정지 자세로 있는데 아빠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아기가 있을까? '뒹굴이 빈이네'를 보고 있으면 그 답이 들리는 것만 같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특별하고 귀하다! 첫아기를 낳고 이 평범한 진리와 만났을 때, 내게 온 세상은 새로운 것이었다.

전에는 무심히 보이던 어린 아이들이, 저마다 특별하고,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졌다. 아무리 추해보이는 어른들도, 주목끌지 못하는 아이도, 다 귀하고 특별하게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뒹굴이 빈이네'가 내게 보여주는 것은 특별한 아기 모습만이 아니다. 빈이가 있음으로 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행복에 나도 전염되게 한다. 빈이가 가져온 셀 수 없는 선물들, 기쁨과 환호와 사랑... 그 풍요함을 보여준다. 한 작은 아기가 어떻게 엄마아빠를 '키우고', 가보지 못한 새 길로 인도하는지도 보여준다. 자그마한 달력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지, 바라볼수록 특별한 선물이다.

'뒹굴이 빈이네'를 보고 있으면 직장여성인 빈이 엄마 지숙 씨도 보인다. 배부른 몸으로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도 그려지고 아기 낳은 엄마로 회사에 복귀하는 모습도 보인다. 세상이 달라 보일 만큼 큰 '일'을 한 후, 도리어 '작아진' 자기를 어색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모유를 계속 먹이고 싶었지만, 출산휴가 두 달 후 대안이 없었을 땐 눈물을 흘렸으리라. 빈이를 데려가서 키워주시겠다는 시어머니를 '섭섭하게'하면서 직장생활과 육아를 함께 결심한 후에 날마다 치렀을 '전쟁'도 보인다.

아침엔 자는 아기를 깨워 놀이방으로, 놀이방에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를 뜯어 맡기며 삼켰을 눈물이 보인다. 퇴근할 때의 종종걸음과 빈이를 놀이방에서 데려오며 아이를 안는 팔에 들어갔을 힘이 느껴진다.

저녁엔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재우느라, 밤에는 보채는 아이 돌보느라 모자랐을 잠시간, 그 사이사이 육아일기 쓰느라 밝혔을 밤이 보인다. 빈이의 아토피 때문에 일일이 만들어야 했던 이유식도 보인다. 아빠가 보조자가 아닌 육아의 주체로 함께 하기까지 이들 부부가 주고받았을 대화며 사랑이 보이는 듯하다.

아주 특별한 선물, 빈이네 달력을 보노라면 내 눈길은 또 빈이 이름 위에 머물게 된다. 아이마다 특별하지 않은 이름이 있으랴만, '이강빈'에 담긴 특별한 의미... 아빠성(이) + 엄마성(강) + 할머니성(빈) = 이강빈. 그 이름 석자 뒤에 희미하게 비치는 우리 사회도 보게 된다. 빈이 성은 정말 '이'일까, '이강'일까? '강이'는 어떤데? 그럼 '강'은 또 어떻고....

11월 20일 오늘, 첫돌을 맞은 아기 빈아!
너의 첫 번째 생일을 많이 많이 축하한다!
네가 준 아주 특별한 선물, 다시 한 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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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 운동하고, 보고 듣고, 웃고, 분노하고, 춤추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읽고, 쓰고 싶은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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