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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매달 시부모님께 100만 원씩 드릴 것
* 미혼인 형님 결혼 준비 자금을 매월 20만 원씩 형 이름으로 적금 넣을 것
올해 스물다섯인 원희(가명) 씨가 결혼을 앞두고 남자친구와 그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결혼 조건이다. 직장동료인 그녀로부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요즘도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더 놀라웠다.
"언니, 너무 속상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
스스로도 악조건이라고 생각하지만 3년 동안이나 사귄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였다.
지난 3월, 경리담당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한 원희 씨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남자들이 결혼 상대자로 좋아하는 '여자다운 여자' 그 자체였다. 약간 웨이브 진 긴 머리가 그랬고, 무릎 조금 아래까지 오는 치마가 그랬고, 무엇보다 나긋나긋(?)한 말투가 그랬다.
그런 원희 씨가 어느 정도 업무도 익히고 타부서 사람들과도 조금씩 얼굴을 익힐 무렵, 느닷없이 결혼 발표를 했다. 그녀는 남자친구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몇 안 되는 여직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자친구와 그 가족에 대해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결혼 전인 형과 함께 사는 남자친구는 둘째인데도 부모님과 계속 살 거라고 했고, 원희 씨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잘못됐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함께 살면서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함께 사는 게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남 차남 할 것 없이 분가하고 싶어하는 요즘 세태에, 원희 씨의 선택은 참으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의 형만 해도 결혼 후 분가하겠다고 미리 선언했다고 한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원희 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나를 포함한 결혼 선배인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선택에 딴지를 걸었다. 두 사람이 벌어서 아이 낳아 키우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생활이 빠듯한지 우리들은 이미 경험에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집에 안 살고 아래윗층으로 살면 괜찮을 것 같지? 나 봐. 아래윗층으로 사니까 두 집 살림하잖아. 퇴근하고 시집에 가서 저녁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다시 우리 집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젖병 닦고 하다보면 12시는 기본이야. 매일매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그러면 남편이라도 내 편이 돼서 집안일도 같이 하고, 퇴근하기 무섭게 저녁 준비하는 나를 위해 가끔씩은 외식으로 해방도 시켜주고 그래야 좀 덜 힘들지. 네 남자친구 그럴 수 있니?"
부모님과 아래윗층에 살아서 괜찮을 거라는 원희 씨의 말에 결혼 3년차인 이 선배는 열변을 토했다.
"나중에 부모님이 그 집 너네한테 물려줄 것도 아니라면서 한 달에 100만 원을 어떻게 주냐? 그 돈으로 적금을 대신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생돈 나가는 건데 나중에 무슨 돈으로 집 사고 애 키울 거야. 애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지 알기는 해? 분유, 기저귀에 직장 다니면 애 맡기는 돈까지 한 사람 월급은 몽땅 들어가게 돼 있어. 거기다 형이 너희 결혼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해줬다면서 형 결혼자금을 왜 니네가 준비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데 넌 바보같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오빠한테 말을 못하겠어요. 오빠가 싫어할 텐데…."
원희 씨의 이 한마디는 어릴 때부터 자기 생각과는 무관하게 남을, 특히 남자를 배려하도록 교육받은 여성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오빠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네 생각을 말해. 정말 수긍이 안 가는데도 오빠가 하자니까 그냥 따라가면 어떡해. 너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 아냐.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결혼의 기본 조건이 사랑이긴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 그 사랑 오래 가지 못해. 오빠가 뭐든 자기 뜻대로 할 텐데 나중에 가서 어쩔려고 그래. 처음엔 힘들겠지만 지금부터 네 목소리를 조금씩이라도 한 번 내봐."
우리들은 기회만 되면 원희 씨에게 남자친구를 먼저 내 편으로 만들라고 끊임없이 코치하고 조언했다. 그녀는 '오빠에게 한번 얘기해 보겠다'는 말로 드디어 우리 아줌마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원희 씨는 '작은 승전보'를 전해왔다.
"오빠한테 얘기했더니, 결혼하면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하고 산대요. 그 게 무슨 무리한 요구냐고 오히려 막 뭐라 그러더라고요. 너무 서운해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 있죠. 그래서 그냥 엉엉 울었어요. 내가 막 우니까 오빠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다 얘기했죠. 100만 원은 너무 많으니까 지금처럼 50만 원만 주자, 형 이름으로 적금은 절대 들어줄 수 없다, 2년만 함께 살고 분가하고 싶다, 그랬죠."
처음엔 당황해 하던 원희 씨의 남자친구도 몇 번에 걸친 그녀의 얘기에 조금씩 귀기울이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부모님과 원희 씨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잘 해서, 월 60만 원만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결혼으로 인해 여성이 감내해야 할 수많은 것들에 대해 그 누구도 그녀에게 얘기해주지 않았고, 그녀는 단지 영화, 드라마처럼 결혼에 대한 환상만을 갖고 있었다.
혼수나 살림살이를 준비하는 것보다 남자친구와의 대화가 몇 배는 더 중요하고, 결혼 후 가사분담과 육아, 양가 부모님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걸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이제 겨우 두 달을 살고서야 원희 씨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결혼하고 난 후 행복할 때도 많지만, 힘들고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너무 많다고 한다.
집에서는 그래도 가끔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 남편이 윗층의 시집에만 가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도 서운하고, 맞벌이를 한다고 식사준비를 맡아 하시는 시어머니가 가끔 '시집살이 호되게 시켜버릴까보다'는 협박(?)성 발언을 할 때도 많이 속상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 제때 먹을 수도 없고―시할머니께서 평소 퇴근이 늦은 남편을 기다렸다 함께 먹으라고 하셔서―퇴근 후 거의 잠들 때까지 시집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남편과 오순도순 둘 만의 시간도 가질 수 없고, 저녁시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등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편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결혼을 하고 나니, 정작 원희 씨는 자신의 부모님께는 용돈 한 푼 못 드리는 게 너무 마음 아프단다.
스물 다섯 살의 원희 씨. 이제 그녀는 결혼 두 달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결혼이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나는 그녀가 우리에게 또 다른 '승전보'를 전해오기를 바란다. 그 '승전보'는 그녀의 행복과 그녀 가정의 행복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여성이 좀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고,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에게 당당할 수 있어야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려면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끼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제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원희 씨가, 그래서 더욱 더 아름다워 보인다. 원희 씨,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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