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벌써 2년 전이 된 2000년에 노인복지관 노래 교실 최고 인기 가요 중에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가 있었다. 하루 종일 어르신들과 지내면서 그 분들이 좋아하시는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 종일 그 노래를 입에 달고 흥얼거리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함께 일하던 동료들 사이에서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 단어를 바꿔 넣고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점심은 아무나 먹나', '연애는 아무나 하나', '승진은 아무나 하나', '퇴근은 아무나 하나' 하면서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또 야근하는 동료에게 먼저 퇴근하는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여성학을 전공한 학자보다는 오히려 과외 한 번 시키지 않고 세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입학시킨 엄마로 더 유명한 박혜란은, 너무도 멀리 있다고 믿었던 노년이 몸의 병을 통해 말을 걸기 시작하자 노년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노쇠한 시어머님과 친정 어머님, 노년기에 접어든 손 위 동서, 노년기의 초입에 발을 디딘 자신과 주위 친구들을 통해 노년을 읽어 나간다.
여자들이 아픈 데가 많은 이유에서부터 나이 들어가는 남편들의 모습과 노년기의 부부 관계, 연세 드신 어머님들에게서 다시 듣는 이 땅의 여자들 이야기, 다 자란 아들과 며느리를 보며 새삼 자신의 문제로 느끼게 된 고부 관계,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보는 노인 세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갈피 갈피를 짚어내고 있다.
정말 노인은 아무나 되는 걸까. 나이를 먹어 60이 되고 70이 되면 그냥 노인이 되는 걸까. 누군가는 노인이야말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일단 살아 남아야 하니까. 전쟁과 질병과 사고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노년기를 맞을 수 있으니까.
새해가 되면서 이제 80이 되신 나의 아버지만 봐도 1920년대 그 어려운 일제 시대에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8·15 해방과 6·25 전쟁, 이산과 실향을 겪으셨고, 앞만 보고 달리던 경제 개발의 시대에 중·장년기를 다 보내셨다. 그리고는 퇴직.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남은 인생 집 한 채에 의지한 채 근근히 살아가고 계시다.
저자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이지만 누구나 다 나이 들어 노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뼈마디에 녹아 있는 인생의 기록들을 그래서 아무나 읽어낼 수 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저자 자신이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늙음이란 젊음이 스타카토로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해 기를 쓰고 늙음을 밀어내려 애쓰는' 우리 삶의 어리석음을 짚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 듦에 대하여〉는 생활 속의 이야기에서 노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쉽고 편안해서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이미 문화적인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만의 여유로움이 곳곳에 배어 있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간혹 위축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참으로 공평한 것은 여유 있으나 없으나, 문화 자원이 많으나 적으나 늙어 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시 노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잘 살기 위해, 잘 늙어가기 위해 새해에는 평균 수명에 비추어 각자 남은 날을 한 번 세어 보는 것이 어떨지….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므로, 새해에는 '산다는 것은 늙어 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염두에 두고 열심히 노년을 이야기하고 나누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나이 듦에 대하여, 박혜란, 웅진닷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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