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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40대 기수론'과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선명한 야당을 향한 쇄신이 성공하면서 신민당은 기존의 몇몇 명망가에 의해 추대하던 대선후보를 '대통령 지명대회'를 통해 선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장파와 당권파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대의원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주류계(진산계)와 중도계의 낙점을 받은 YS가 신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주류계의 DJ는 구당권파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서 진행되는 '대통령 지명대회'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전국대의원과 일반국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활동을 진행했다. 반면 YS는 구당권파의 지지와 중앙정치권에 대한 정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결국 YS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패배를 겪고 말았다.

결국 당시의 두 번째 민도는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써 구당권파의 권위주적 중장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민주적 질서의 구축이 민도였던 것이다. 즉, 군사정권과 불투명한 노선을 갖고 있던 구당권파로부터 독립적이며, 신민당을 군사정권과 분별정립하는 당의 쇄신을 책임을 질 수 있는 후보자였던 것이다. 결국 당권파의 지지를 받은 YS보다 전국 평대의원과 국민의 지지를 얻은 DJ가 승리한 것이다.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

박정희 군사정권이 영남기득권세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당후보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라는 선거전략이 동원되었다. 1차 투표에서 YS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2차투표에서 YS를 지지하기로 했던 이철승계가 DJ를 지지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라는 지역주의 선거전략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지역차별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역주의가 선거전략의 하나로 선택되었다. 당시 지역주의 선거전략은 현재의 지역분열구도의 성격과 조금 차이가 있다. 즉 군사독재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지역주의가 정치자원으로 선택된 것이다. 달리말하면 독재정권을 청산하기 위한 국민적 합의 민도였다고 볼 수 있다.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라는 선거전략은 DJ가 승리하는데 결정적 변수는 아니었지만 대의원 득표과정에서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세 번째 민도는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야당후보가 승리하기 위한 선거전략으로서 지역주의를 정치자원으로 선택한 것이다.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승리

71년 신민당의 대통령 지명대회에서 DJ가 대역전극을 통해 선출된 것은 한마디로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적 질서의 승리이다.

즉, 신민당과 국민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대항마로서 선명한 야당 지도자를 선택했다. 즉, 민주회복을 위한 수권야당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둘째, 군사정권의 대항마라는 자격으로써 구당권파에 의한 권위주의적 중앙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선택한 것이다. DJ 대역전극의 백미는 바로 대통령 지명대회와 같은 민주적 제도의 도입과 민주적인 야당으로 전환하려는 신진세력의 도전이 승리한 것이다.

셋째,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정치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호남득표력과 영남비주류세력의 지지"라는 지역주의가 선택되었고 DJ 대역전극의 부분적 변수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70년 신민당 대통령 지명대회의 결정적 변수는 군사정권의 대항마와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구당권파의 권위주의적 질서에 도전하는 신진세력의 '민주적 질서'라는 민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은 '70년 신민당의 교훈', 국민경선제 대역전극이 보인다.Ⅲ ▶70년 한국정당 최초의 "대통령 지명대회"▶당권·대권의 분리와 정치 유동성의 증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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