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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노조 경영방침의 삼성그룹이 독일에서 노조설립을 막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다 독일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다."
이것은 지난 95년 3월 경향신문의 한 토막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라고 안 새겠냐'며 핀잔을 들은 그 바가지는 이제 고쳐졌을까.

지난해 12월 22일 삼성SDI(대표이사 김순택) 울산 공장의 최모 반장이 회사 관리자들에 의해 만 이틀 동안 납치,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며칠 전 현장에 '구조조정 반대, 희망퇴직 중단, 사내 하청화 반대' 유인물이 배포되었는데, 최 반장은 관련자 중의 한 명으로 지목 받아온 상태였다.

사건 직후 최 반장이 병실에서 작성한 사건 일지에 의하면, 최 반장은 이날 12시경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김모 반장을 따라나섰다가 정모 부장과 동석하게 됐다. 정모 부장은 거절하는 최 반장에게 계속 술을 마시자고 강권한 후 차에 태워 밀양까지 이동했다.

밀양 ㅂ농장에는 삼성 SDI 관리자 3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인물에 관해 아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들은 이야기가 있을텐데"라며 유인물 배포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최 반장이 "지금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납치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자 이들은 "이 일이 끝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여기를 떠날 수 없다"고 답했다.

최 반장은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을 가려다 5미터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굴러 다리와 허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창녕-현풍-남지-진주 등지를 거쳐 23일 새벽 지리산의 한 모텔에 투숙했다.

이동하던 중 차모 관리자는 최 씨의 머리채를 잡아 차 밖으로 끌어내리고 머리와 얼굴을 때리며 "죽인다. 생매장 시킨다. 확 끌어 묻어버린다"는 등의 폭언과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지리산 모텔에서 "모든 사실을 경위서로 작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최 반장은 이들의 요구대로 두 차례에 걸쳐 서약서와 경위서를 제출하였고 12월 24일 오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12월 30일 새벽, 전치 4주의 진단을 받고 울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최 반장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새벽 3시경 회사 사람과 함께 나갔다는 것만 확인될 뿐 그 이후 지금까지 연락이 두절된 채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아 사실상 '행방불명' 상태다.

삼성SDI 측은 이에 대해 "최 반장과 개인적으로 합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모 부장이 직접 병실에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했다는 것. 그리고 유인물을 통해 이번 사건을 알리는 해고자들과 지역 노동단체들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납치, 감금 사실을 수긍하지 않았으니 사실을 날조하지 마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삼성해복투. 위원장 김성환)는 "최 반장이 회사측과 합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집요한 회유와 협박의 결과이다"라며 "관리자들은 울산에 모텔을 정해놓고 숙식까지 해가면서 병원에 입원해있는 본인과 그 가족들을 접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삼성 해복투는 지난 1월 7일 민주노총 울산본부(본부장 박준석)와 공동으로 울산 지방검찰청에 관련 책임자들을 고발했다.

이들은 "권리 찾기에 나서는 해당 사업장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활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삼성SDI가) 계획적ㆍ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로서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최모 씨가 사실 관계를 작성한 일지 사본, 그가 딸에게 송신한 문자 메시지('아빠 납치된다. 경찰에 신고해라')를 촬영한 사진, 상해진단서 사본 등을 증거 서류로 첨부했다.

이번 노동자 납치 의혹이 사측의 '합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이미 수 차례나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98년 10월 송모(부산사업장) 씨, 1999년 2월 장모(부산사업장) 씨, 1999년 12월 고모(수원사업장) 씨, 2000년 10월 김모 (천안사업장) 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각 사업장에서 은밀하게 노동조합을 준비하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특히 송모 씨의 경우 지난해 여름 집회 도중 땡볕을 피해 그늘로 옮겼다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불과 몇 개월 후인 지난 연말에는 집회 발언 내용을 이유로 업무방해, 명예훼손 혐의로 재차 구속되었다.

삼성해복투 김성환 의장은 "삼성은 그동안 물리력, 공권력, 돈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조 건설을 막아왔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러한 완력이 언제까지 통할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삼성 SDI의 경우 고용 문제나 사내 하청 문제 등 노동자의 생존권이 직접 위협받고 있으며 이번 유인물 사건도 그 연장선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김 의장은 또 "이번에 유인물을 배포한 사람 중 한 명은 99년에 납치 당해 일본까지 끌려간 장본인이다. 두 번 납치, 두 번 감금, 한 번 폭행 당했다. 그런데도 이번에 또다시 유인물을 배포했다. 언젠가는 삼성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르고야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라고 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고 했다. 과연 삼성의 '신화'가 이길지, 아니면 범인(凡人)의 '상식'이 이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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