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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닮은 사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986년이었을 게다. 당시 나는 몇몇 교사들과 함께 '문학교육연구회'를 만들어 우리나라 문학교육의 문제를 짚어보고, 국정이었던 국어 교과서를 비판하는 책을 출판했을 때였다. 어느 날 키가 껑충하고 비쩍 마른 사람이 우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눈이 둥글고 커다란 것이 겁이 많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김진경이었다.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한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어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밖에 나가면 이런 책을 써봐야겠다고 꼽아본 게 있었어요. 그 중 하나가 국어 교과서 비판이었거든요. 그런데 나와 보니 그 책이 이미 출판되어 있지 뭐예요.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말한 책은 우리가 쓴 '삶을 위한 문학 교육'이었다. '민중교육'을 읽고 막연히 상상했던 인상과는 달리 그는 날카롭기보다는 느릿느릿한 전형적인 충청도 사내였다. 그 만남 이후로 그는 국어교사모임을 만들고, 교과 연합을 만들고, 전교조를 결성하는 일의 중심에 서 있었고, 나도 그런 저런 일로 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그 한편으로 그는 여러 권의 시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와 같았다. 표정조차 모래바람이 버성기는 듯 껌벅껌벅하는 것이 낙타와 같은데, 자기가 해야 할 일이면 묵묵히 속내를 감춘 채 밀고 나가는 것도 긴긴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 같았다. 그 뚝심은 교육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이어졌는데, 교육문예창작회를 만들어 전국의 교사 문인들을 모아내고, 시 뿐만 아니라 동화, 소설을 쓰는 등 바쁜 가운데서도 그의 뚝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환타지 동화의 가능성을 연 '고양이 학교'

그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네 권의 책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책을 썼나 하며 책장을 넘기던 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가 보내온 책은 '고양이 학교'1-4(문학동네 어린이)였다. 그동안 곁에서 지켜보아 온 바로는 진지하고 뚝심 있는 글만 써오던 그의 이력과 이번 동화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에 웃음이 나온 것이다.

고양이 학교는 우리나라 환타지 동화의 새 장을 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유명세를 타면서 환타지 동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늘어났는데, 고양이 학교는 또 다른 면에서 우리 어린이 문학계에 새로운 환타지의 전통을 세우는 작품이라고 할 만 하다.

해리포터가 영국의 기숙학교 전통을 바탕으로 상상력의 공간을 넓혀낸 작품이라면, 고양이 학교는 신화적 전통을 상상력으로 길어낸 생태 동화라고 할 수 있다.

민준이네 집 고양이 버들이가 가출을 했다. 고양이는 15살이 지나면 인간의 세계에서 떠나 고양이 학교로 가게 되는데, 버들이도 고양이 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고양이 학교에서 이 세상에는 생물 종들간의 평화스러운 공존을 꿈꾸는 '수정 고양이' 무리와 다른 생물종을 파멸시킴으로써 자기 고양이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그림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두 세계간의 대결이 고양이 학교의 중심 축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고양이 세계만을 다루지 않는다. 수정 고양이와 밤의 고양이의 갈등 속에 민준이나 세나와 같은 어린이들로 대표되는 인간의 세계도 연결이 된다. 즉 이 이야기는 고양이의 입을 통해 인간 세계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 학교에 간 버들이를 비롯한 메산이, 러브레터는 마법을 배우고 마음을 합쳐 그림자 고양이의 음모에 맞서 싸운다. 특히 수정동굴에 갇혀 사는 그림자 고양이의 대장격인 불랙 캣을 만나고, 그들의 마법에 맞서 고양이 학교 학생들의 마법이 빛을 발휘한다. 일식인 아포피스의 밤에 버들이를 비롯한 고양이 학교 학생들은 납치된 세나와 러브레터를 찾아 죽음의 나라와 얼음 벌판을 떠돈다.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그들은 세나와 러브레터를 구해 온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자폐증을 앓던 세나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양이 학교의 꼬깜 선생님이 사라지고, 버들이 일행은 다시 꼬깜 고양이를 찾아 나서는데, 시시각각 그림자 영역의 막이 그들을 덮쳐오기 시작한다.

이상이 현재 출간된 4권까지의 중심 줄거리다. 이런 이야기만 보면 고양이 학교는 모험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고양이 학교는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동화는 생태 동화, 환경 동화라고 할 수 있다. 불랙 캣의 수정동굴로 찾아온 버들이 일행에게 불랙 캣이 멸종된 생물종의 무덤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아포피스의 날을 앞두고 민준이네 학교에서 벌어진 쓰레기 소동, 우체통 고양이를 찾아 떠난 길에서 쓰레기 산으로 변해버린 푸른 들판의 모습, 생물 종간의 대결이냐 화합이냐를 중심 주제로 삼은 것 등은 글쓴이가 지향하고 있는 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세계는 바로 환경과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 나가는 세계에 대한 꿈이다.

이 동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서사적 이야기 속에 신화와 설화를 적절히 버무려 넣었다는 데 있다. 고양이 학교는 우리나라 바리공주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신화와 벽화, 스칸디나비아와 중국의 신화들이 서로 얽히고 짜이면서 서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 면에서 불랙 캣이 수정동굴에 갇혀 있고, 그 세계를 찾아 나서는 버들이 일행의 이야기는 세계의 보편적 설화인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 하다.

거침없는 상상력의 확대는 신화적 문맥 속에서 더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적인 능력은 인간적 능력을 초월한다. 그러니 이 동화야말로 신화라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을 동화라는 어린이 문학 속으로 끌어들여 창조해 낸 환타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환타지 동화들이 대부분 허황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흥미 위주로 그려냈다면, 김진경의 고양이 학교는 신화라는 전통적 이야기의 틀을 바탕으로 현실적 주제인 생태 환경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환타지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쓸쓸한, 그러나 올곧은

지난 1월 중순, 김진경은 내 고향집을 찾아와 하룻밤을 지내고 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수묵화처럼 어둠과 밝음이 서로 섞이고 있는 새벽에 그는 어디 먼 곳으로 긴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웅얼웅얼 이런 말을 건네 왔다.

"어느새 내 나이 오십이야. 이제 나는 깨달았어.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 말이야. 시를 쓸 때는 그 시기가 시로 발언해야만 하는 때였고, 소설을 쓰고, 교육 평론을 쓰고, 문건을 쓰고 하는 것들이 모두 그 시기에 내가 할 역할이었던 거지. 지금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바로 동화 쓰기가 아닌가 싶어. 고양이 학교는 그런 고민의 결과이고 말야."

그런 그의 말투는 쓸쓸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변혁기를 몸으로 살아낸 그의 삶이 그 말속에 다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5권을 더 써서 모두 열 권으로 완성할 예정이라는 고양이 학교가 끝나면 그는 또 어떤 글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을까?

이튿날 아침, 눈 덮인 벌판을 건너가는 그를 보며 나는 또 낙타를 떠올렸다. 결코 바쁘지 않게 느릿느릿 사막을 건너가는, 그러나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는 그가 가고 있는 사막 저 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고양이 학교 1부 세트 - 전5권 - 1부 세트

김진경 지음, 김재홍 그림, 문학동네(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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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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