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다.
이번 설 연휴는 꽤 긴 편이긴 한데 연휴 끝은 여전히 짧기만 하다. 명절 스트레스가 많은 주부들일수록 이런 연휴는 더 짜증이 날 것이다. 연휴 시작되기가 무섭게 시집에 가야하고,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내고 친정에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집과 친정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게 되니 친정에 들러 얼굴 도장 찍고 돌아 나오기가 바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어찌 안 쌓이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번 설에 시집에 갈 일도 없는데, 보름 전부터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주 분명했다. 내 불안감의 정체는 남편과 시집에 대한 죄스러움, 특히 시어머니와 윗동서에게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윗동서의 허락도 받았는데 왜 마음은 자꾸 불안한지. 그 불안감은 결혼 이후 처음으로 이번 설을 시집이 아닌 친정에서 보낼 수 있게 됐다는 즐거움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
3년 전, 결혼을 하고 첫 명절인 설날 연휴는 고스란히 시집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2∼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라 명절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귀성 전쟁은 별로 없었다.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내고 친정에 가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집 식구들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남들 다 하는 귀성전쟁에 동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 때도 설날 뒤의 연휴가 딱 하루밖에 없어 대구에서도 한참 시골로 더 들어가야 되는 친정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올 걸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거기다 차 막히는 걸 나보다 더 못 견디는 남편까지 다음에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친정에 가지 않았더니 언니와 형부는 왜 안 오냐고 난리였다. 내가 '귀성 전쟁에 동참할 엄두가 안 나 친정 가는 걸 포기했다'고 했더니, 언니는 남들은 다들 그러고 오는데 넌 왜 못 오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설 연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한 가지 제안했다. 설날과 추석에 번갈아 가며 양쪽 집을 방문하자고. 남편은 의외로 쉽게 찬성했다. 명절 때마다 도로에서 꼬박 이틀을 보내면서까지 양쪽 집을 다 가는 것은 남편도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합의를 했음에도 온전히 명절 때 친정에만 가는 것은 이번 설이 처음이다. 그 동안 한 번의 설날과 두 번의 추석 명절이 지나갔지만 늘 그럴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시집에 가야만 했다. 남편도 막상 동의는 했지만 실천하기에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먼저 우리 집에 가자고 단 한 번도 말을 꺼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작년 설날, 시어머니께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윗동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고 남편이 시어머니와 형님 부부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추석 때는 처가에 간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 시어머니께서는 별 말씀 없이 알았다고 하셨고, 형님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남편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지난 추석에는 연휴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친정으로 내려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친정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이 다 되어 있었다. 부모님께 미리 전화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대뜸 시댁에 차례 지내러 안 가고 여긴 왜 왔냐고 호통부터 치셨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사위 보기가 민망해서였으리라. 11개월 된 외손자의 낯가림에도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시집간 둘째딸이 온다고 손수 칼국수를 만들어 총총 썰어놓으시고, 우리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호박을 듬뿍 삶아 달디단 손칼국수를 끓여주셨다. 그런데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친정 가까이 사는 오빠와 올케 언니, 조카까지 모여 술까지 한 잔했는데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옆에 있는 남편도 참 어색해 보였다.
하룻밤을 자고 추석 전날, 다시 짐을 꾸려 시집으로 길을 서둘렀다. 내 마음도 그랬지만 불편해하는 남편을 그대로 모른 척 하기가 왠지 미안했다. 이렇게 처음 시도했던 명절 친정 나들이는 반쪽짜리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추석 전날 시집에 가서 전 부치고, 추석 차례를 지냈으니까 말이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멍석을 깔아줘도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바보, 물을 떠다 줘도 마시지 못하는 천치가 바로 나였다. 왜 남편의 기분을 살피고 시집 식구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까. 그런데 이번 설에도 또 눈치를 보고 있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께서 먼저 친정에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이다.
시어머니와 윗동서 모두 진심으로 나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내가 지레 눈치 살피고 가슴 졸이는 건 아닐까. 남편도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괜히 불안해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 아마도 30년 넘게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가르쳐온 ‘결혼한 여자로서의 당연한 도리’ 때문일 것이다.
정말 이번 설에는 친정에 가서 제대로 놀고, 푹 쉬다가 오고 싶다. 미리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더니, 또 그 말씀이다.
“시댁에 제사 지내러 안 가고 여길 왜 오냐?”
“제사 지내러 안 가도 돼요.”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래도록 못 본 외손자도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신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 오빠와 올케 언니도 지난 추석 때 추석 전날 처가에 갔었는데, 이번 설에도 아마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언니와 형부도 설 이틀 전에 온다고 한다. 물론 왔다가 하룻밤만 자고 설날 전에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명절 때 언니와 형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가족간의 만남’이라는데 솔직히 그 가족이 남편의 가족을 얘기하는 거 아닌가. 내게도 언니가 있고, 오빠가 있는데 함께 만날 수 있는 명절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 같은데, 뭐 좋은 대안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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