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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사노라면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때가 참 많다.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생각하는 것도 그럴 때가 많다. 나는 늘 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보면 아이들이 나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새 학기면 4학년이 될 아들 훈이와 3학년이 될 딸 지야. 이들과 내가 최근 몇 권의 책을 함께 읽었는데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 중 아이들이 독후감을 쓴 '나답게와 나고은'(김향이, 사계절)과 함께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답게는 열 살 남자 아이, 나고은은 일곱 살 여자아이다. 답게 아빠와 고은이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해서 둘은 남매가 되었다. 답게가 어릴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책은 엄마 없이 살던 답게가 어떻게 엄마와 여동생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떻게 이겨 가는지 주인공 답게가 화자가 되어 풀어간다.

"나는 나답게 살아야"한다는 뜻의 이름 나답게. 이름처럼 답게는 엄마가 없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빠의 사랑 속에 '나답게' 잘 자라왔다. 그러나 갑자기 생긴 일곱 살 짜리 동생 고은이가 어른들의 사랑을 다 차지하는 거 같으면서 그의 괴로움이 커졌다. 아직 어린 답게는 자신과 아주 다른 고은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답게와 고은이만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특히 나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엄숙한 어른일 경우 날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그렇다.

"세 권 중 제일 짧아서 그걸로 쓰기로 했어요."
독후감을 쓰기로 한 날 훈이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었지만 녀석은 책읽기에 비해, 쓰는 건 즐겁지 않다는 얘기였다. 이런 아이들 때문에 어떤 집은 따로 논술과외라는 걸 시키는 걸까(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다). 짧은 거 긴 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생각하는 힘, 쓰는 힘이 부족하다는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쓰기를 하긴 한다. '독서 기록장' '일기장'들이 그걸 말해준다. 그러나 검사를 위한 글쓰기, 숙제로 내 준 양을 채우기에 급급한 글쓰기가 아이들에게서 재미를 앗아가는 걸 보아왔다. 재미있는 책을 읽고도 재미없는 글쓰기를 하는 아이들을 구원할 길로 생각한 게 독서감상문대회에 응모하는 것이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우선 몇 권의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들의 속생각을 표현하도록 대화하는 즐거움,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도록 말동무가 되어주는 즐거움. 아이들의 순수한 생각에 여지없이 깨지는 나의 낡은 교과서적 사고. 거기다가 아이마다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에 이르러 나의 즐거움은 거듭 증폭되었다.

"그래, 너는 무슨 얘길 쓰고 싶니? 뭐가 기억에 남아?"
"답게는 괜찮은데 고은이가 너무 맘에 안 들어요."
멋진 교훈적인 얘기가 나올 걸 기대했던 나는 내심 움찔하며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래? 고은이가 어때서?"
"너무 건방지고 답게를 화나게 했잖아요. 식구들도 모두 자기만 사랑하게 만들었고. 답게가 가출해서 맛을 보여 줬어야 하는 건데..."

훈이가 제 또래인 답게와 자신을 동일시하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너무 놀라운 말을 쏟아놓았다. 고은이가 한 말과 행동들을 떠올리며 나는 훈이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들어야 했다.
"오빠는 몇 살이야? 난 일곱 살인데." "아저씬 우리 엄마가 더 좋아요? 제가 더 좋아요?" "그럼 저 오빠랑 나랑 누가 더 좋아요?"...

처음 답게네 집에 와서도 고은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할머니께 말해서 답게가 심부름을 하게 했다.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사사건건 지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떼를 써 답게의 미움을 샀다.

'그래도 그렇지 고은이를 미워할 거까지야. 넌 엄마 아빠가 다 있으니 모를 거다. 엄마와 살아온 아이의 숨은 아픔을. 아빠와 오빠가 생겨서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게 행동했을까. 재혼으로 만난 아빠와 엄마, 새가족이 서로를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상상해볼 순 없겠니. 답게 아빠 성을 따라 '민미나'에서 '나고은'이 되는 길에 놓여있 는 호주제....'
훈이에게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내 속에서 그렇게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아이가 말하게 하려면 나는 일단 들어야 했다.

"그럼 그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은 어디야?"
"답게가 등산학교에서 등산한 거요."
가족의 소중함이니, 새로운 가족 개념이니 하는 얘기를 기대한 나는 역시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등산하는 장면이 제일 멋있다는 거야?"
"네. 답게가 도전해서 이긴 거 말이요."
"도전하고 이겼다? 멋진데? 근데 작가가 등산 얘기하려고 이 책을 쓴 걸까?"
"답게가 거기서 뭔가 생각하고 결국 이긴 걸 말하고 싶었겠죠."
"뭘 이겼는데?"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과의 싸움? 와! 그말 좀더 풀어서 해볼래?"
"고은이를 엄청 미워했는데 나중엔 그애를 진짜 동생으로 느끼고 사이가 좋아졌잖아요. 그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거라 생각해요."

아이들의 맘속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대화 시간이 길어지는데 훈이 눈은 더욱 빛이 났다. 답게가 고은이를 미워하며 갈등할 때 자기도 많이 괴로웠나 보다.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자기도 그런 자기싸움을 했다는 말인지...

훈이가 책상 앞에서 신나게 쓰고 있을 때 지야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왔다.
"나답게와 나고은에서 너는 뭐가 제일 맘에 들어?"
"답게도 좋고 고은이도 좋은데 고은이가 더 맘에 들어요."
"그래? 고은이의 뭐가 맘에 들었어?" 같은 책 같은 인물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은 작정이라도 한듯 달랐다. 무슨 얘기가 계속될지 기대되지 않는가.

"고은이 성격이요. 낯선 사람 만나서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말도 잘하고 어른들하고도 금방 친해지는 게 좋았어요."
역시 복잡한 가족관계에서 뭔가 나오길 요구하진 말자고 나는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들어야 했다.
"그래? 고은이를 잘 이해했구나. 고은이가 미운 점은 없고?"
"나는 낯선 사람들이랑 얘기하면 그냥 네 네 만 할 때가 많잖아요. 하긴 고은이가 오빠한테 너무 심하게 하는 점도 있었지만. 하여간 고은이 성격이 좋아. 편지 쓸래요."
"그래. 네가 쓰고 싶은 게 그렇다면 그렇게 해."

그래서 딸의 독후감은 나고은에게 쓰는 편지글로 정해졌다. 쓰기 전에 아이는 고은이의 좋은 점을 한참 더 얘기했다. 낯을 좀 가리고 수줍음을 타는 자기와 달리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고은이의 말과 행동이 그렇게 좋았을까. 딸이라고 얌전하라 한 적이 한 번도 없건만 성격이 다른 걸 어쩌랴. 제 오빠와 남동생이랑 셋이서 놀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두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가 맘에 드는 식으로 독후감을 썼다. 자기 생각들을 정리하고 얘기한 뒤라선지 원고지 6매를 후딱 채워버렸다. 각자의 마음을 잘 표현한 글이라, 단락이며 반복되는 문장 빼는 것 말곤 손봐줄 게 없었다. 이렇게라도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걸 배운 결과물로 우리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독후감대회에 응모했다.

"아주 수고했네. 그래 독후감 써 보니 어때?"
둘 다 이메일로 글보내기를 마쳤을 때 내가 슬쩍 물어 보았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엄마."
"좋았어요. 어떻게 쓰는 건지 좀 알 거 같아요."
와, 재미있었다니 얼마나 듣고 싶던 말인가. 나의 생각 속에 도전해 들어온 녀석들 덕분에 내겐 몇 배 더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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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 운동하고, 보고 듣고, 웃고, 분노하고, 춤추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읽고, 쓰고 싶은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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