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쿵쾅", "우르르"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엔 아이들이 뛰어내리는지 '쿵쿵'소리까지 난다. 어김없이 밤 9시만 되면 들려오는 소리에 일거리를 잔뜩 가져와 정신을 집중해야하는 오늘은 정말 참기 힘들다. 너무 한다 싶어 오늘은 말을 하리라 생각하고 인터폰을 했다.
"안녕하세요? 아랫집인데 오늘 아이들이 유난히 뛰네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내 딴에는 점잖게 이야기를 했는데 되돌아오는 말,
"아! 아랫집이요? 아이 없으시죠?"
나도 피해를 입지만 참고 있다는 말을 전하려는 내게 생뚱 맞은 질문이었다.
"아마 새댁도 아이가 있으면 이런 전화 수없이 받을 거예요. 그러니 같은 입장에서 그냥 넘어가 주세요."
갑자기 화가 났다. 아이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랫집에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히 사과를 하고 넘어 가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말씀을 듣고 있으니 좀 이상하네요. 제가 아이가 없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못 참고 말했단 말씀이세요?"
"아유, 오해는 마세요. 나도 아이가 없을 때는 참을 수 없었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해가 간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위층 아줌마는 아이들이 뛰어다닌 일에 대한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는 조심한다고 말한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쾌했다. 마치 내가 아파트의 공동 생활을 하면서 참을성 없는 아줌마 취급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2년 동안 아래 윗집에 살면서 어김없이 밤이 되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를 계속 참다가 전화한 것인데 이렇게 말하다니...
나는 결혼 생활한 지 이제 만4년이 된 주부다. 하지만 아이는 없다. 불임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도 우리 부부 모두 이상이 없단다. 그래서 단지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부부는 매우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리는 편이다. 어른들께서도 "기다리기야 하지만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거라"시며 기다려주고 계신다. 하지만 느긋해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가 없는 부부를 바라보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결혼을 하고 1년 내지 2년 안에 아이가 없으면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고 생각해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자마자 태도들이 변한다. 무척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며 주변의 아이가 없어 고생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물론, 나를 위로한다고 시작하는 말인 줄은 알겠지만 마치 중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기적적인 민간요법으로 치유된 사례를 말하듯이 아이 낳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아들 낳은 여자의 속옷을 가져다 빨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며 내게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신기해 남편에게 말했더니 "하하, 아직도 그런 거 믿는 사람이 있대? 당신 그런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써도 되겠다. 하도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한다.
언젠가 동네 슈퍼 아줌마와 이야기하다가 결혼 생활 5년 차에 접어든다고 해서 놀라시더니 아이가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에이, 인생을 알려면 아직 멀었네. 결혼 생활을 10년 동안 해도 아이를 낳아보지 못하면 인생의 절반도 이해 못해. 살림도 아이를 낳아봐야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하신다. 나는 이 비슷한 말을 결혼 전에도 들었었다. 결혼을 하지 못하면 인생의 절반 밖에 살지 못하는 거라고 그때도 어른들은 말하셨다.
물론 모두 나를 아끼고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물에 빠져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아이를 애타게 기다린다면 남이 입다 버린 속옷을 다시 입으면 어떠하고 제주도에서만 난다는 선인장의 꽃을 따먹으면 어떠하리.
다만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삶의 행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대할 때의 태도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가진 외모와 취향은 다양하다. 키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영화보다 책을 좋아하는 반면, 책보다 영화를 좋아할 수도 있다. 외모뿐 아니라 삶의 방식 역시 다양하다.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이성애자일 수도 있으며, 장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혼자 살 수도 있으며, 20대 초반부터 결혼을 꿈꿀 수도 있다.
나와 다른 경험과 모습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와 같은 경험과 모습을 해야만 너는 삶을 잘 사는 것이라고, 너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 너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너의 경험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에 소중하며 내게도 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자신의 경험과 삶의 방식, 생김새, 환경이 보편적인 다른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로 가득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전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지만 그 경험 또한 소중하므로 당신과 나누고 싶은데 들어 보시겠어요? 당신의 세상 바라보는 눈을 넓히실 기회랍니다"라고.
덧붙이는 글 | 사람마다 세상사를 보는 눈은 다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줌마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거창하게 페미니즘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아줌마들의 시각으로 전하고자 할 뿐입니다.
'아줌마들만 봐!' 연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부터 약 2주간 한 편의 글이 '아줌마들만 봐!' 타이틀로 오마이뉴스에 연재될 것입니다. 남편을 말한다(2월 18∼19일), 결혼을 말한다(2월 20∼22일), 아줌마를 말한다(2월 23∼26일), 육아를 말한다(2월 27∼ 3월 1일), 나를 말한다(3월 2일 ∼ 4일)의 소제목에 따라 각각 두세 편의 글을 올립니다.
마침 2월 22일은 오마이뉴스 창간 2주년입니다. 우리는 이 기획연재에 아줌마 뉴스게릴라들의 동참을 기꺼이 환영합니다.
- '아줌마들만 봐!'연재 참가자 일동
'아줌마들만 봐!'연재에 우선 참여한 사람들은 아줌마들의 인터넷 해방구인 웹진 줌마네(www.zoomanet.co.k)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줌마들입니다.
이번에 글을 쓴 박진숙은 아줌마로서 당당하게 살고, 깊은 마음의 눈을 갖고 싶어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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