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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가, 외삼촌…. 모계쪽 일가붙이에 따르는 외(外)라는 말이 싫어서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분당 할머니', '화곡동 할머니'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같은 성산동으로 이사를 하시는 바람에 어느 사이엔가 '친할머니','외할머니'로 부르게 됐다.

우리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는 누구일까. 어릴 때 완전히 맡아 길러주시는 바람에 엄마보다 더 많이 만난 외할머니. 엄마인 내가 정규적인 출퇴근을 하지 않는 지금도 살림을 돌봐주시느라 수시로 오시는 외할머니. 하루에 한 번씩은 외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심부름을 위해 킥보드를 타고 씽씽 다녀오는 외할머니댁. 방학 때 먼 시골 외할머니댁에 간다는 이야기가 낯설기만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는 어떤 존재일까.

영화 <집으로> 속의 상우는 어느 날 갑자기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 갈 수 있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진다. 전자 오락기, 로봇, 롤러블레이드, 피자, 햄버거, 후라이드치킨의 세상에서 온 일곱 살 개구쟁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외할머니는 꼬부랑 허리에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글도 읽을 줄 모른다.

하루 아침에 엄마와 떨어져 낯선 시골에 온 상우는 자기의 요구대로 안 되는 모든 것을 할머니 탓으로 돌리며 화내고 울고, 할머니를 괴롭힌다. 그런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는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손자는 전자 오락기의 밧데리를 사기 위해 할머니 은비녀를 훔치고, 할머니는 닭고기가 먹고 싶다는 손자에게 후라이드 치킨이 아니라 닭백숙을 내오고, 두 사람의 생활은 그렇게 흘러간다.

시골에 혼자 남은 할머니.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를 닮은 쓰러져 가는 작은 집. 무심하게 보이는 산과 들. 빨래줄에 손자의 옷과 나란히 널려 있는 할머니의 일상복인 구멍난 런닝 셔츠. 다 닳아 버린 손톱. 이가 빠져 호물거리는 입. 아이의 기막히고 어이없는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문득 문득 쓸쓸해지고 또 따스해지는 것은 그 안에 할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데리러 올 날을 앞두고, 할머니는 전화도 못하니까 아프면 편지하라고 글씨를 가르쳐주는 손자와 따라 써보는 할머니. 그러더니 어린 손자가 먼저 울고 할머니도 주름진 손등으로 눈가를 닦는다. 나도 따라서 울고 옆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던 친정 어머니도 우신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두운 밤길에서 내내 말씀이 없으시던 엄마가 한마디 하신다. '이 영화 할머니, 할아버지들 다 보여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직접 영화관으로 걸음을 옮기시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차라리 부모님 모시고 영화 보기를 하면 어떨까, 부모님 모시고 오면 한 사람은 '무료' 입장을 시켜주는, 뭐 이런 걸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뒤를 잇는다.

밤에 화장실에 간 손자는 그저 무섭기만 하다. 화장실 거적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주는 할머니. 정말 나의 외할머니였다. 아이가 하는 말도 어쩜 그리 똑같은지. "할머니, 거기 있지? 가면 안 돼. 자면 안 돼."

올 봄에 성묘하러 가서 외할머니께 그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 '할머니, 맨날 무섭다고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했던 것 생각나세요? 저 정말 많이 컸지요? 우리 아이들 보이세요? 할머니….'

딸과 손자는 자기 집을 향해 떠나고 배웅을 마친 할머니도 자기 집으로 걸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 그 길 위의 할머니. 이 세상 모든 외할머니, 아니 모든 어머니들의 길이다.

상우 할머니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읽듯이, 모든 어머니들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지 않을까. 다만 듣고도 듣지 못한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말하지 않는 세월을 사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영화 속의 상우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이며 어머니이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다.

덧붙이는 글 | (감독 이정향 / 출연 김을분, 유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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