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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이면서 소설가인, 당대의 지성으로 손꼽히던 아내. 그 아름답고 똑똑한 아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했던 말을 또 하며, 단어의 철자를 잊어버리고,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두려움 속에서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옆에서 이 모든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남편.
가끔 노인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면 처음에 인사를 나누고 나서 어르신들께 가장 관심 있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어나가곤 하는데, 노년기 최대의 걱정인 '치매'를 중심으로 간단한 기억력 테스트나 숫자 게임 등을 하면 예외 없이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치매를 일러 '황혼의 늪' 아니면 '장수 사회의 함정'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언변, 깊은 통찰력을 지닌 아이리스. 고지식한 학자인 존은 아이리스의 자유분방함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펼쳐 보이는 아이리스, 청중 속에 앉아 아내를 바라보는 존의 표정에는 늘 자랑스러운 미소가 피어난다. 아이리스에게 있어서 말은 그녀의 전부이다. 그런 아내가 말을 잃어버린다.
아이리스의 병으로 생활 전부가 흔들리지만 남편 존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내의 뇌의 일부가 텅 비어버린 것을 알고 있지만, 아내의 말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믿으며 자신이 아내의 말을 배우겠노라고 한다. 때로 아내의 자유분방했던 시절이 떠올라 화를 내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같은 아내를 감싸고 함께 아파한다.
진정한 언어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말의 세계를 자유롭게 헤엄쳐 나가던 소설가에게 말과 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이겠다. 그 죽음의 수렁에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죽음이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으로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된다. 그러나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같이 갈 수 있는 곳은 또 어디까지일까. 치매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일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존은 아내 아이리스를 요양원에 입원시킨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존. 역시 그 길만은 함께 가지 못하는 길이다.
영화는 치매가 발병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사이로 두 사람이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사랑, 아픔, 기쁨, 슬픔이 모두 교차된다. 아이리스의 기억 또한 그렇게 현재와 과거가 서로 오가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리스처럼 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긴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이 노년의 그늘 속에서 오가는 기억을 나누며 함께 손을 잡는 일, 그 또한 사랑 없이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사랑은 뜨거운 열정을 넘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때에만 가능한 그런 사랑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노인분들이 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헌신과 사랑으로 배우자의 치매를 수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Iris 아이리스 / 감독 리처드 아이어 / 출연 주디 덴치, 짐 브로드벤트, 케이트 윈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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