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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참으로 고통스런 여행길에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나에게 여행이 고통이었던 적은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현실이 고통이었으니, 현실을 떠난 여행이 고통일 까닭이란 애초에 없었지요.

나는 삶과의 갈등에 직면할 때마다 늘 버리고 떠났습니다.
내 생애는 버리고 떠남의 반복이었고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렸으되 한번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떠났으되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났으나 늘 다시 돌아왔습니다.
버리기 위해 떠났으나 더 큰 짐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면 늘 같은 자리였습니다.
연자방아에 묶인 소처럼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갈등은 풀리지 않고 미봉 되었을 뿐입니다.

언젠가 도법 스님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얽혀 무책임하게 버리고 떠나는 행위는 또 다른 안주를 낳고 아울러 무의미한 무질서를 부른다"고 갈파하셨습니다.
갈등의 시공간을 벗어난 관계로부터의 도피가 결코 갈등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을 충고하신 것이지요
그것은 비단 타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나는 늘 타자로부터만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도 도피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떠났고, 그것을 이름하여 여행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물론 눈앞의 대결을 피하는 가장 손쉬운 선택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기까지 했습니다.
타자와 대면하려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과도 대면하려 하지 않는 것 일테지요.

모든 갈등의 유일한 해법은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길뿐입니다.
현실과 정직하게 맞서는 길뿐입니다.

고통에 찬 여행으로부터 고통 가득한 현실로의 회귀.
이제야 나는 어제의 여행이 고통스러웠던 까닭을 알겠습니다.
하늘 아래 고통 없는 땅은 없고, 갈등 없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의 세계란 세계는 모두 인토(忍土)이고,
존재란 존재는 모두 견뎌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인토(忍土)에 거처하는 나에게 이제 더 이상 현실을 떠난 여행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낯익은 여행인 것처럼 여행이란 낯선 현실일 따름이지요.

예전의 나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났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돌아와 나와 정직하게 맞서기 위해 떠납니다.
돌아와 현실과 정직하게 맞대면하기 위해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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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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