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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꽝꽝 얼어붙어 조용하기만 하던 작은 폭포에서 물소리가 난다. 하도 반가워 한참 동안 마주서서 그 소리를 듣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물 흐르는 것이 참 기특하다 싶어서다. 그러다가 얼른 생각을 돌린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기특하게’ 여기는 나의 방자함이 자칫 봄의 행차를 늦추지나 않을까 하는 아이 같은 염려가 슬쩍 스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봄은 이렇게 올 것이다.”
이 내용은 수필집에서 퍼온 글이 아니다. 국악을 좋아하는 나도 생소한 생소병주 <수룡음>이란 국악을 소개한 글인데 국악방송의 편성제작팀장인 송혜진 씨가 펴낸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에서 내 눈에 퍼뜩 들어온 글 중의 하나이다.
본래 <수룡음水龍吟>은 독특한 금속성의 소리를 머금은 ‘생황’과 맑고 그윽한 음색이 자랑인 ‘단소’를 함께 연주하는 이중주곡이다. 느짓하고 한가롭게 들리는 이 <수룡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 변화도 거의 없을 만큼 어쩌면 어렵고 지루한 곡일 것이다.
하지만 송혜진은 이 <수룡음>을 소개할 때 이렇게 하나의 수필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마력을 보여준다. 그는 계속해서 <수룡음>의 매력을 펑펑 쏟아내고 있다.
“이런 음악을 듣는 동안은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분한 마음이 오래 머무르지 않아서 좋다. 여유있게 흐르는 <수룡음>의 가락이 봄기운에 녹아내리는 얼음물처럼 밉고 분한 차가운 마음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다가 짐짓 나 혼자 지나친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면, 마음으로 오래 사귄 친지들에게 드리는 봄 선물로 준비해도 좋을 것 같다. 얼었던 물 흐르는 소리처럼 메말랐던 사람들의 마음에 ‘느낌의 강’을 흐르게 할 봄 음악 <수룡음>을.”
이런 글을 읽고도 <수룡음>을, 국악을 들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무언가 마음이 메마르고 굳어있는 사람은 아닐까?
계속해서 내 마음을 휘어잡았던 부분을 또 소개 해보자.
“‘쑥대머리’라는 말, 임방울의 노래를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벌써 흑백 영상처럼 떠오르는 고향의 언덕,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유년기의 슬픈 기억에 휩싸여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고, 임방울 명창이 목메게 부르는 그 노래를 마치 ‘울고 싶은데 빰 맞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마음놓고 눈물을 쏟고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임방울이 부른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를 표현한 내용이다. 이렇게 이 책의 어디를 보아도 글쓴이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돋보이는 아름다운 글의 연속임을 나는 느낀다.
국악에 대한 일반 국민의 정서는 보통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음악으로 치부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이네클라이네나하트뮤직’,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 또는 비틀즈는 알아도 우리의 남도민요 ‘육자배기’는 잘 모르며, 정악 ‘영산회상’이나 ‘종묘제례악’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의 국악은 정말 민족의 정서를 어떤 음악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해내는 음악이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을 대중이 잘 알아주지 않을 때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국악을 듣고 싶은 의욕이 생기도록 잘 소개해주는 것이야말로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일일 것이다.
국악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을 탓할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것을 탓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송혜진의 책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은 정말 보물같은 존재가 아닐까?
책을 읽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린 나지만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는 단숨에 읽어야 할 정도로 마술에 걸렸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옥에도 티는 있는 법,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해 본다.
물론 편집자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지만 음반을 소개할 때 음반표지 사진을 너무 작게 인쇄한 점이 아쉬웠으며, 악기나 명인들의 사진을 실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
또 악기 편성의 부분에서 ‘농악과 사물놀이’란 말을 썼는데 이것은 잘못된 용어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11-마호 ‘임실필봉농악’ 누리집(http://www.pilbong.net)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신할까 한다.
“예로부터 풍물굿에 대해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이 "농민의 음악"이라 하여 "농악"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오고 있으나, 이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첫째, 조선시대의 지배계층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통치적 의도에 의해 민중적 대동성이 거세되어 버린 조작된 용어이다. 농악이라는 용어는 농사꾼이 하는 음악 즉, 농사에만 쓰이는 음악으로 인식될 소지가 많다. 물론 농경사회에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 공동체적 심성이 있는 곳 어디서나 그 가치를 발휘하고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도 훌륭한 기능을 담당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의 마음을 이렇게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수필집 같은 아름다운 글과 함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민족문화계 명사들의 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과 영어 등 외국어의 조합을 남발하거나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애쓰고 있으며, 국악에 대한 깊은 열정이 느껴진다는 데 있다.
나는 송혜진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알고 싶다. 이런 훌륭한 책을 펴낸 그를 나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면 아부일까?
책은 1부 ‘마음 고요하고 가슴 따뜻한 국악’이란 제목으로 명사들이 추천한 국악, 국악방송의 청취자들이 가장 많이 신청한 국악 등을 소개한다. 이어서 2부는 ‘국악감상의 길라잡이’란 제목으로 국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장르별로 조언하고 있으며, 3부는 ‘가슴을 적시는 고운 님의 노래’라는 제목을 달고, 판소리, 민요, 가곡 등의 성악곡들 추천하고, 성악곡들이 어떻게 심금을 울려내는지 표현 한다.
다시 4부는 ‘마음 깊은 곳 두드리는 그 악기의 그 소리’라는 제목을 달고, ‘종묘제례악’을 비롯한 각종 기악곡들에 무게를 달아주고 있으며, 5부는 국악에 담긴 선비들의 멋과 풍류, 명고수와 명창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6부는 그림으로 보는 우리 음악사, 7부는 아름다운 한국 악기를 소개한다.
그는 국악을 들을 때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다음과 같은 ≪장자≫(오강남 풀이, 현암사)의 <심재(心齋:마음 굶김)>편을 강조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보세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 보세요. 그런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 보세요. 귀는 고작 소리로 들을 뿐이고, 마음은 기껏해야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텅 빈 기氣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기다립니다.”
먼 산의 철쭉이 흐드러졌는데 집 앞의 목련은 진다. 봄날은 간다. 꽃이 지며, 이 봄날은 서럽게 간다. 하지만 이 봄날을 그냥 맥없이 보내지 말고, 이 송혜진의 책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을 한번 읽어보자.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아름다운 국악을 한번쯤 들어 보자. 그러면 이 봄은 가슴 아리다 못해 아름다운 향기를 내게 주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 송혜진, 다른세상, 2002. 3
다른세상 : www.dd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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