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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책은 몇 가지 면에서 좀 특이하다. 글쓴이는 미국 사람이면서 그림은 한국 사람이 그렸으며 내용은 바쇼라는 일본인 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개를 보니, 바쇼는 1600년대에 살았던 일본의 꽤나 유명한 시인이란다. 그는 '하이쿠 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하이쿠는 일본의 대표적 시 형식으로 열일곱 음절로 된 아주 짧은 시이다. 시인의 일상과 그의 작품을 이렇게 동화라는 형식을 빌어 그려내 어린이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발상이 놀랍다.
작가는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에서 삼년 동안 살면서 시인 바쇼를 접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책에 나오는 바쇼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그가 지어낸 것이다. 하지만 동화를 따라가다 보면, 계절의 변화에 따른 아름다운 시적 정취와 함께 바쇼가 남긴 세 편의 시도 맛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특히 그림 또한 빼어나 읽는 이들을 동화 속에 푹 잠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시와 여우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얘기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바쇼는 그의 오두막 근처에 있는 벚나무에서 버찌를 엄청 따먹어 주둥이가 빨갛게 물이든 여우를 만났다. 바쇼는 여우를 쫓아 버리려고 했으나, 녀석은 바쇼가 멋진 시를 한 수 써주기 전에는 버찌를 그냥 내줄 수 없다고 한다. 위대한 시인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거다. 그것도 단 세 번의 기회만 주어질 뿐이다.
이렇게 하여 여우가 바쇼의 시를 평하는 평론가의 위치가 되었다. 바쇼는 괜찮은 시 한 수쯤이야 식은 죽 먹기로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흔쾌히 장담했다. 바쇼는 여우가 깜짝 놀랄만한 감동적인 시가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시 한 수를 챙겨 정해진 날 여우를 만났다.
자두 향 풍겨
산길 위로 일순간
솟는 아침 해
달빛 아래 졸졸거리는 시냇물 곁에서 이같이 감동적인 시를 읊었건만 여우는 악평을 가한다. "자네는 시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한참 멀었네!" 바쇼는 한 달 동안 열심히 시를 쓰고 고치고 빼고 다듬으며 다시 시 한 수를 써서 정해진 날짜에 여우를 만났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여우는 "조금 낫군. 하지만 그 정도는 새끼 여우들도 할 수 있어"라는 평을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딱 한 번의 기회가 남은 바쇼는 한 달 동안 아무리 시를 쓰고 다듬어도 맘에 든 게 하나도 없었다. 정해진 날이 다되었지만, 여우에게 보여 줄만한 시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시도 들고 가지 못한 채 여우 앞에 섰다. 깊은 근심에 잠긴 바쇼에게 갑자기 시상이 하나 떠올랐다.
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이 시를 들은 여우는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완벽한 시를 쓰실 줄은....정말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부터 이 버찌는 영원히 선생님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연신 감탄했다. 바쇼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여우는 왜 이 시에 감탄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다른 시에는 여우가 나오지 않지만, 이 시에는 여우가 들어 있다는 것. 그때부터 바쇼는 좋은 시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이 동화가 그냥 정형화된 교훈이나 던지려 하는 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짧지만, 문학 작품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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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여우
한성옥 그림, 팀 마이어스 글, 김서정 옮김, 보림(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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