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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길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길- 소록도 가는 길' 전문)

▲ 소록도 항 근처 언덕에서 바라본 녹동. 배로 5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천형의 세월만큼 먼 곳이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고통의 극한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고통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입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의 극한마저도 일상적인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한번이라도 저 고통의 극한까지 가 본 적이 있었던 것일까요.

소록도 가는 길, 벌교에서 녹동까지 넓게 깔린 신작로는 달리기 좋았습니다.
작은 고통에도 엄살을 떨며 살아온 생애가 녹동 부두에서 소록도 행 철선에 오릅니다.

이륜차에 타고 있던 노인 한 분이 지그시 웃습니다.
나는 반갑게 인사합니다.
많은 관광객들 틈의 유일한 소록도 주민.
뭐 볼 것 있어 오느냐고 말씀 하시면서도 노인은 뭍에서 온 나그네를 기쁘게 맞이합니다.

노인은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 뭉툭한 두 손을 맞잡고 하나뿐인 왼쪽 눈으로 싱글거립니다.
신발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발가락도 성한 것은 몇 개 없을 테지요.
일요일이라 그런가, 배에 탄 관광객들이 제법 많습니다.

"여기 사신 지는 오래 되셨어요"
"삼 십 년이 넘었지, 67년도에 들어 왔으니까"
"몇 달 전에 산청 성심원엘 다녀왔었습니다"
"그래, 그럼 천주교 신잔가, 나도 신잔데. 백 야고보라고 하지, 내가 성심원에도 살았드랬어"

성심원엘 한번 가봤다고 하자 노인은 고향 사람 만난 것처럼 더할 수없이 정겹게 대하십니다.
지나간 수 십 년, 사람으로부터 위로받은 시간보다는 사람으로부터 천대받고, 상처받은 세월이 더 많았을 것을, 지금쯤이면 사람이 진절머리가 날 만도 하련만, 노인에게는 아직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노인의 몸짓에서 고통의 극한까지 가본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나옵니다.
사람의 품격이라는 것이 저런 것일까.

배는 5분도 못돼 소록도에 도착합니다.
구경 잘하고 가라고, 노인은 손 흔들며 먼저 가고, 뒤에 남은 나는 못내 섭섭해 한참을 선창머리에 서성거립니다.
집에 같이 가 소주나 한 잔 하고 가라고 청해주길 바랬던 것은 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요.

선착장을 떠나 섬 안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오릅니다.
이 섬까지 오는 길에 넘어온 고갯길도 많았을 것을 고개는 또 웬 고갠가.
소록도 사람들은 이곳을 귀양살이 오는 심정으로 울며 왔다가, 정든 섬을 차마 떠나기 어려워 울고 넘어간다 하여 아리랑 고개라 부른다지요.
고개를 넘으며 부르던 아리랑.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벗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한하운, '나' 全文)

한하운 시인이, 또 수많은 한하운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넘었던 아리랑 고개를 오늘은 몸 성한 내가 넘습니다.
소록도 성당을 지나 원불교 교당 앞을 지나려는데 고라니 두 마리가 숲에서 튀어 나와 잠시 두리번거리다 이내 다시 숲 속으로 달려갑니다.

중앙공원으로 가는 해변은 나들이 나온 상춘객들로 활기가 넘칩니다.
갯벌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고동을 줍고, 조개를 캐느라 열심이고, 또 더러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삼결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며 웅성거립니다.
어느 곳에서도 소풍은 즐겁습니다.

지척에 깨끗한 건물의 병원이 서 있고 병실 안에서인 듯, 한 할머니의 외마디 비명이 들립니다.
인간에게 타자란 무엇일까요.
타자의 불행이나 고통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병원 건물 앞에 이르자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인 주민 주거 지역과 중앙 공원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철조망이나 울타리가 없어도 주거지역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앙공원으로 가는 길목 오른편, 붉은 벽돌담의 감금실이 처연합니다.
일제 시대 병원 관리자들의 처우에 항거하던 환자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굶주림에 떨게 하던 악명 높은 사설 교도소 건물입니다.
건물 창은 일반 교도소와 다를 바 없이 쇠창살이 둘러져 있습니다.
감방 복도에는 김정균이라는 환자가 쓴 시 한편이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에 따라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내가 불신자였다면 이 생명 가치 없을 바에는
분노를 기어이 폭발시킬 것이오나
주로 인해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하나이다

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김정균, '감금실' 全文)


한동안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옵니다.
"학생은 여가 머 하는 곳인지 알고 왔나?"
"....."
"소록도가 나병 환자 촌이라"

양심을 지키며 끝내 반성문을 쓰기를 거부했던 김정균도 다른 환자들처럼 출감시에는 단종(斷種)수술이라 불린 강제 정관 수술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당국의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이 감금실에서 무수히 고문당하고, 단종 당하고, 또 죽어 나갔습니다.
그때 일제에 항거하다 죽어간 이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신원(伸寃)이라도 됐을까요.

이제 나는 감금실을 나와 자료관으로 갑니다.
거기 문득 눈에 띄는 한 사건과 인물이 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지금까지 나는 이 의인의 이름조차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이춘상.
나환자 이춘상의 소록도 병원장 슈호(周防正季) 살해 사건.

▲옛 화장터
소록도에 강제수용된 환자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화장터 역시 자신들이 만든 '빨강 벽돌'로 만들어졌다.ⓒ 소사모 제공

일제 말기 소록도 병원장이었던 슈호는 손과 발, 어디하나 성치 않은 나환자들을 강제 노역장으로 내몰아 벽돌을 찍고, 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골재 운반 등을 하게 해 환자들의 피땀으로 직원관사 42동과, 물품 창고 2동, 소록도 일주 도로 등을 완성 시켰습니다.

슈호는 또 연간 6천킬로의 송진채취와 30만장의 가마니 짜기, 1500장의 토끼가죽과 3만 포대의 숯 제조 등, 전쟁 군수 물자 조달에 환자들을 동원했지요.
그 죽음보다 더한 강제 노역과 매질과 고문을 견디다 못한 많은 나환자들이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하다 익사했습니다.

심지어 슈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참배까지 시킨 미치광이였습니다.
1942년 6월20일 슈호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정례 보은 감사일.
식도를 가슴에 품고 있던 이춘상은 직원, 원생 등 약 3천여 명과 함께 동상 앞 광장 도로에 서 있다가 동상을 향해 올라가는 슈호를 가로막고 외쳤습니다.

"너는 환자에 대하여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외침과 동시에 이춘상은 식칼로 슈호의 앞가슴을 힘껏 찔렀습니다.
슈호는 의무실로 옮겨졌지만 이날 오후 큰 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후 이춘상은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요.
하지만 이춘상은 법정진술에서도
"슈호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의분에 의한 것이다. 원장이 총애하는 사또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 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했다. 이것이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고 싶었던 것"이라고 당당하게 진술했습니다.

나는 자료관을 나와서도 코앞의 중앙 공원에 가지 못하고 오래 서 있습니다.
스스로의 고통에 떠밀려 떠나왔던 소록도 행.
나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곳이 없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가요.
나는 스스로의 티끌만 한 고통도 감내하지 못해 몸부림치는데, 의인은 고통의 극한에서도 이타행에 목숨을 던졌습니다.

부끄럽지 않은가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이름만큼이나 값지고 숭고한 이름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
이춘상 의사.
의사의 이름 앞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묵묵히 소록도를 떠나 다시 보길도로 왔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일제의 폭압에 항거했던 그 의로운 이가 독립된 국가로부터 어떠한 기림을 받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순국 선열이나 독립 유공자로 예우를 받고 있을까. 그의 시신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까.

돌아와 나는 서둘러 국가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갑니다.
국가 보훈처 민족 정기 선양센터, 애국지사 참전용사 찾기 코너에 '이춘상'이란 검색어를 입력시킵니다.

'입력된 자료가 없다"고 나옵니다.
예상은 했으되 씁쓸한 심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현행 독립 유공자 예우법에는 순국선열을,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로만 한정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이춘상 의사처럼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다 순국하였어도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다는 의식이 없이 행동한 것이라면 어떠한 국가적 예우도 받지 못하고 마는군요.
목숨을 걸고 일제의 폭압에 항거했으나 순국 선열이 아니라니!
그가 나환자였기에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저 역사란 누구의 역사입니까.

나는 의인의 의로운 행동을 뒤늦게 알고서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국가는 진정 이춘상 의사와 같은 의인들에게 아무런 꺼리낌도 없는 걸까요.
국가에게 묻고, 역사에게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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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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