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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유친'의 사전적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음"이다. 부자유친은 군신유의, 부부유별, 붕우유신, 장유유서와 함께 오륜의 하나이고, 전통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윤리이었다.

'나라의 충성, 부모의 효도'란 구호 속에서 자랐지만, 효는 백행의 근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윤리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도 부모님께 효도가 더 먼저이다. 그 부자유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필자는 '신 부자유친'을 쓴다.

부자유친은 있지만, 왜 모녀유친은 없을까? 오늘날 가정생활을 살펴볼 때, 아버지와 아들이 친한 것보다 어머니와 딸이 더 가까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모녀유친'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사실 부자유친보다는 모자유친이나 부녀유친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군신간에는 '의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리를 강조하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퇴색되기 쉽기 때문에 부자간의 '친애'를 강조했다면 모르지만, 아버지와 아들간에 '친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인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이상으로서 부자유친은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서 부자유친을 찾기는 쉽지 않다.

또한 부자유친은 있지만, "왜 자부유친(子父有親)이란 말은 없을까?"이다.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낱말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으로 바뀐 민주국가에서 "공무원은 국민에게 충성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가 넘치는 민주국가에서 부부유별(婦夫有別)과 함께 자부유친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류는 지난 수백만 년동안 선대가 후대를 가르치는 사회에서 살았다. 이때 아버지로 대표되는 어른은 아이의 보호자이고, 교육자이며, 훈육자이었다. 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대로 어른이 행하는대로 살아가면 큰 불편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후대가 선대를 가르쳐야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컴퓨터가 그러하고, 외국어가 그러하며, 경쟁이 치열한 새로운 영역일수록 젊은이의 참여가 없으면 안 된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면서 군신유의는 신하가 임금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부부유별은 자칫 성차별을 합리화시키는 미신의 하나로 비판받고 있다. 장유유서도 "찬물도 위아래가 있으므로 아이들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난히 부자유친은 흔들림 없는 윤리적 덕목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음"이 윤리라면, "자식과 부모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음"도 윤리일 것이다.

지구촌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의 고령화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잘 살기 위해서도 '자부유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가 되어 가는 '어르신'이 늘어나고 있다. 그 어린애 어르신을 누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노동능력은 떨어지고, 집안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며, 마침내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일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이 이를 때, 누가 어린애 어르신을 보호할 것인가? 봉양할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일차적으로 그 자식이 모시겠지만, 혼자 사는
노인처럼 모실 자녀조차 없을 때 사회와 국가는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우리는 생활 속에서 고사성어를 지당한 말씀으로 받아드리는 가운데, 변화된 세계에 맞는 새로운 성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신 부자유친에서는 바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큰 소리로 주장하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 이 칼럼
의 취지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 출발점은 행복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용교 기자는 한국청소년개발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한 바 있고, 현재 광주대학교 교수이다. 연락처는 ewelfare@hanmail.net  홈페이지는 www.welfare.pe.kr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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