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배수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손석 씨가 노랫말을 쓰고 유현석 씨가 가락을 붙이고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어린 시절에 '엠비씨 육대 가수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들었는데, 아직도 입에 붙어 가끔 흥얼거립니다.

"사랑이 무어냐..." 유행가 질문치고는 참 큰 질문입니다. 사실 문학과 예술, 종교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 대답을 찾는 것일 겝니다. 대문호들과 사상가들 중에 그 주제를 안 건드려본 사람이 없습니다. 옆자리의 짝꿍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대우주의 하모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찬양되거나 갈구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사랑관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연탄불 위에 꼼장어 익어가고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 어지러운 대포집에서 어깨 너머로 얻어들을 수 있던 것이 바로 사랑 이야기들입니다. 요즘도 술병 종류나 술잔 크기가 좀 바뀌었을 뿐 그 위로 오고가는 속사정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리의 약장수(요즘은 찾아보기 힘들겠습니다만)와 기업 강연회 강사들에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에 이르기까지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면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습니다. 섹스 이야기를 슬쩍 곁들이면 효과 만점입니다. 약도 많이 팔고 강사료도 오르고 인기도 높아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흥행에 민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사랑을 건너뛸 리가 없습니다. 주제가 아니라면 양념으로라도 반드시 끼워 넣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마를 줄 모르는 영화의 단골 메뉴입니다.

흥행이란 게 원래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냐'에 달렸지 않습니까? 그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그 관념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직접 경험이 여의치 않으면 간접 경험이라도 원하는 거지요. 그런데 도대체 왜 사람들이 그러는 걸까요?

한마디로 사랑은 '짜릿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구름에 뜬 것 같고, 안 먹어도 배부르고...

사랑은 우연이라든가, 제 눈에 안경이라든가, 국경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도 많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냥 '사랑은 짜릿하고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서양의 '러브'는 '짜릿하고 좋은 것'이라는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웹스터 영어사전에 보면 러브(love)는 라틴어 루브에레(lubere)에서 유래한 말인데 '기쁘게 하다'라는 뜻이랍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나누어 생각하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사랑하다'를 네 가지 말로 표현했습니다. '아가페'와 '필리아,' '스토르게'와 에로스'가 그것입니다. 이 낱말들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 덕분에 아주 유명해졌지요.

정욕적인 사랑을 가리킨다는 에로스나 형제애를 가리킨다는 필리아, 또 부모의 자식 사랑을 가리킬 때 더러 사용되는 스토르게도 모두 '좋아하다, 인정하다, 즐겨하다'는 뜻입니다.

아가페는 기독교에서 특히 소중하게 여기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명령이 모두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가페의 동사형인 '아가파오'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대상일 경우 '환영하다, 즐겁게 하다, 좋아하다'는 뜻이고, 물건이 대상이면 '(그것으로 인해) 기쁘다,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영어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에 나타난 '러브'은 모두 '짜릿하고 좋은 것' 계열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다지 기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바로 앞에 든 나훈아의 노래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군요.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그 노래는 사랑하다가 '버림을 받으면' 울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어지거나 버림받지 않아도 사랑은 '원래'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자 문화권의 '사랑 애(愛)'에서 발견됩니다.

'愛'자는 세 부분으로 파자(破字)됩니다. 우선 맨 윗 부분은 '목메일 기'자입니다. 음식을 삼키다가 목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 부분은 '마음 심'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맨 아랫부분은 '뒤져올 치'자입니다. 사람 다리에 무거운 것, 예를 들면 차꼬 같은 것을 달아서 빨리 걷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자 문화권의 사랑(愛) 개념은 영어와 라틴어와 헬라어의 그것과는 달리 그다지 유쾌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메이고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우유 선전 시리즈 중에 뻑뻑한 쿠키를 잔뜩 입에 쑤셔 넣고는 그걸 녹여 삼킬 우유가 없어서 쩔쩔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또 숙직 근무 중에 빵을 먹으면서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을 듣는데, 우유가 없어 목이 메이는 바람에 1백만 달러짜리 문제를 맞출 기회를 놓치는 이야기도 나오지요. 아무리 광고를 위한 허구라 해도 그 답답한 마음만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또 남자 분들은 군대에서 행군해 보셨겠지요? 그럼 완전 군장에다가 다리에 모래주머니 달고도 해 보셨나요? 그러면 사랑 애(愛)자가 무슨 뜻인지 실감나시겠군요.

이렇게 목이 메이고 다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을 주는데 거절당해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그래서 원하던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목이 답답하고 숨막혀도 카악 내뱉어 버리면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차꼬를 훌쩍 풀어내 버리면 그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숨통을 죄고 발목을 부여잡아도 그영저영 견디며 버티어나가는 것이 사랑이랍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영화와 유행가는 '사랑하면 좋고, 그걸 못하면 안 좋다'로 요약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변화를 주더라도 사실은 거기서 몇 걸음 못 벗어납니다. 이런 사랑 개념은 그 근원이 헬라, 라틴, 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권의 러브(love) 개념입니다.

이 러브는 아마도 1950년대 이후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 같습니다. 혹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생 중심의 소위 지식인들이 선구적으로(?) 들여왔는지도 모릅니다. 자유연애라는 기치아래 말입니다.

'러브'가 주제인 한국 소설 중에서 세간의 폭발적인 인기를 처음 얻은 것은 1954년의 신문소설 '자유부인'입니다. 그때가 한국에서 사랑(愛)이 러브(love)로 넘어가는 분수령이었지 싶습니다. 끝에 가면 '다들 가정으로 돌아간다'로 되어 있어서 좀 어정쩡하기는 합니다만, 소설 전편은 '좋은데 어쩌란 말이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던가요? 요즘 한국의 세태를 보면 그저 '러브' 일색입니다. 대중문화에서는 그게 가장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요. 마치 '러브' 때문에 '사랑'이 완전히 밀려난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90년대 인기를 끈 소위 '바디(body)'와 '섹스(sex)' 담론 덕분에 이젠 러브조차도 아주 말초적으로 국지화되어 가는 듯합니다. 그런 담론이 '서유럽의 천재 사상가들의 말씀'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그런지 다들 아주 안심하고서 열을 올려가며 거기 몰입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제몫 찾아주기' 운동이 한창입니다만, 러브 개념만은 그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의 사랑(愛)은 서양의 러브(love) 개념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랑은 '짜릿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힘들어도 참는 것'이었으니까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