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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가속적으로 팽창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많은 좌파들이 그들의 신념을 잃어갔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사회주의 자체의 몰락으로 규정하고 선전하는 신자유주의 진영의 '오만'에 좌파 진영 스스로의 '자괴'와 '냉소'가 곁들여지면서, 마침내는 좌파 스스로 '제 3의 길'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변용'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갈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너머'를 꿈꾸고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발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구좌파'들이 '사회주의 자체가 몰락했다'는 환상과 타협하고 있는 동안,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교훈삼아 아직 도달하지 못한 '너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타계한 삐에르 부르디외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노암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당연한 것이라고 선전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의제기'는 단순히 '세계화'의 범주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들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고 있다. 자율적인 사상이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의제기'를 통해 스스로의 자율성까지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세계화'는 모든 개별 인간들을 기존의 국가 혹은 정부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해체 작업은 모든 개별 인간들을 '세계 시장'이라는 더 큰 형태의 권력에 귀속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시장'의 꼭대기에 자리잡은 '하이퍼 부르주아지' 계급이 추구하는 '세계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진정한 다원성과 개별성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세계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여전히 '지역적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많은 민족들에 대한 자기 권력 과시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네트워크와 인터넷 문화는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다.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세계 자본에 의해 그 운영이 독점되고 있는 네트워크와 인터넷 문화는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재생산해낼 뿐이다.
정보 혁명과 의학 혁명에 의한 기술 발전은 개별 인간의 존재범주를 존중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들은 결국 시장의 상위 계층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용할 뿐이며, 또 다른 형태의 '배제하기'를 통해 새로운 계급화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렇듯 그들 좌파 지식인들은, 눈에 보여지는 부분의 '뒷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이란 실제로는 진실의 얼마나 작은 부분일 뿐인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보아야 비로소 전체적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그들은 끊임없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란 행동이다. 그리고 자유는 동시에 스스로 제한할 줄 아는 행동이다. 즉, 자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을 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이상한 '자유주의'는 스스로 제한할 줄 모른 채, 끊임없이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난 뒤에는? 아마도 신자유주의는 마지막으로 남은 존재인 스스로를 먹어치우게 될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연 '희망'은 끝났는가? '아니다'. 모든 것을 교환 가치로써 평가하려는 신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까지 사고 팔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모든 개별 인간의 존엄성에의 추구야말로 좌파의 '본질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아직 희망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 동안 '좌파'에 대한 논의 자체가 차단되어 왔다. '사회주의'는 곧 '빨갱이'담론이 되어 모든 관계성을 상실해 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모든 좌파적 가치들은, 결국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역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좌파적 가치'란, 자본주의가 '보지 못하는 부분'과 '보지 않으려는 부분'들을 '보여주고' '치유하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를 '소유'의 관념에 귀속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그것이 바로 '프리바토피아(privatopia)'이다. 그리고 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는 것.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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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피에르 부르디외 외 지음, 최연구 옮김, 백의(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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