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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역사쓰기'
한 때 우리사회의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포스터모더니즘' 열풍은 각계각층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표방하던 '틈새, 불연속성, 텍스트화' 등은 기존의 갑갑한 '모더니티'의 세상을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시원한 청량 음료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차이'와 '틈새'를 찾아내서 보여주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철 지난 유행 상품처럼, 그저 모더니티에 지친 지식인들이 한때의 머리식힘을 위해 취급했던 철학적 사조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열광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아직 근대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탈근대화'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며 다시 그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하나의 철학 사조를 그저 유행으로써만 취급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철학 사조 역시도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거늘. 설령 그것이 우리네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념'과 '세상보기'까지 외면해서는 안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역사쓰기'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텡 게르의 귀향>이다.
이 작품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역사서술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역사학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형식으로 접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루하고 딱딱한 '교과서적' 역사서술이 아닌, '이야기'로써의 역사서술. 물론 여기서의 '이야기'는 순전히 창작된 그런 것이 아닌, 철저히 사료에 의거하되 그 사료가 '언어'의 장막으로 덮어버리고 있는 '실재의 틈새'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역사적 상상력'에 의한 이야기를 말한다.
여기에는 많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 체계들이 동원되고 있다. 진즈부르크가 '치즈와 구더기'에서 보여주었던 미시사적 서술 - 이것은 마치 탐정이 아주 사소한 단서를 가지고 전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의 미메시스(mimesis)를 보는 듯하다 ―이나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 보여준 '텍스트의 고고학'―최초의 텍스트를 덮고 있는 수많은 시간의 관념들을 파헤쳐 내려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가히 '고고학'이라 불릴 만하다 - 등이다. 또 로버트 단턴이 '고양이 대학살'에서 보여준 '치밀한 묘사'―우리가 '역사 속의'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관념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나는 역사 속의 인물과의 동일시가 중요하다 ―등 모두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역사 서술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신문화사적 서술'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문화사적 서술이 우리네 역사학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 자체도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관념인 만큼, 결코 그 자체로써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화사적 서술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자세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도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부분'들을 볼 수 있는 시야의 확대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거대사적 서술'은 브로델이 비판했듯이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망이 가능한 여러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집이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전체적인 구조는 보면서, 정작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신문화사적 서술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상보기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제 그것은 유행이 지난 것이다'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열기가 식어버린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신문화사적 서술이 시도되었다면, 그것이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후예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갖는 진정한 의미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아직 근대화도 이룩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탈근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근대화 '너머'의 것을 미리 봄으로써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의 근대화를 이루어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마르탱 게르 되기
보통의 경우에는 원작 텍스트가 먼저 나오고 난 뒤에 그것의 영화화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탈레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영화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에 기반해 텍스트가 구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특이한 역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16세기 프랑스 농촌,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 한명인 마르탱 게르. 이 모든 것은 '실재'들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각본에 의해 선택되고 움직이는 '화면', '배우', 그리고 '연기'일 뿐이다. 화면에 보여지는 프랑스 농촌은 오늘날의 것이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과 말들은 오늘날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16세기의 것들이라고 믿게 된다. 16세기 프랑스의 농촌, 16세기를 살던 사람들, 그리고 16세기의 마르탱 게르. 우리는 '현대'에 만들어진 영상을 보면서 16세기를 보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역사'가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실재' 역사가 존재할까?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실재' 그대로 파악해낼 수 있을까? 그 '실재'를 덮고 있는 수많은 시간의 관념들을 우리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신문화사적 역사 서술이 그 해답으로써 제시하는 것이 바로 '되어보기'이다.
마치 영화 속의 배우들이 스스로가 16세기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당시의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며 살아갔을 지를 대본 ―이 대본은 물론 사건의 전체적인 조망을 가지고 있는 감독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을 보며 파악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배우로서의 나'를 잊고 '16세기 프랑스를 살던 한 농부'가 '되어버리 듯이', 우리가 실재 역사를 보다 더 실재로써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를 살던 사람들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가짜 마르탱 게르의 역을 맡았던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화면 속에서는 더 이상 제라드 드빠르디유가 아닌, '실재' '가짜 마르탱 게르'에 근접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가짜 마르탱 게르'라는 '역사적 실재'를 어느 정도 복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화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현대라는 시간대에 현대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 자체가 '16세기 프랑스 되어보기'를 실행함으로써 화면 속에 하나의 '역사적 실재'를 형성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실재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짜 마르탱 게르' 역시도, '진짜 마르탱 게르 되어보기'를 통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짜 마르탱 게르'의 삶의 범주를 스스로 형성해 낸다는 사실이다. '가짜 마르탱 게르'는 '진짜 마르탱 게르'의 모든 정보와 그의 개인적인 역사, 그의 주변 환경, 그리고 심지어는 진짜 마르탱 게르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무의식'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되어보기'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형성해 낸 것이다. 그러기에 '진짜 마르탱 게르'의 아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구들까지도 이 '가짜 마르탱 게르'를 '진짜 마르탱 게르'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짜 마르탱 게르'는 '진짜 마르탱 게르'보다 더 '진짜 마르탱 게르'같은 존재범주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 개별 주체들의 인생이라는 것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의 '되어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인간'의 존재 범주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관념들, 즉, 가족, 친구, 공동체, 국가 등과 같은 수많은 관념적 '자아' 되어보기 - 그런 개별주체들의 집합이 바로 역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되어보기' 조차도 완벽한 '실재 역사'의 복원이 되지는 못한다. 왜? 그것 역시도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관념이 덮고 있는 하나의 '텍스트'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영화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마르탱 게르'에 관한 실재 역사를 복원해내기 위해서 참조하는 모든 사료들, 이것들은 당시의 사람들과 그 이후의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다. 즉, 순수한 '실재 역사'가 아닌 그 '실재'에 대한 당시와 그 이후 사람들의 '관념'이 덮고 있는 텍스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런 텍스트에 의한 과거 복원은 또다른 '텍스트의 복원'일 뿐이지 '실재역사'의 복원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텍스트들 가장 깊숙한 곳에 가려져 있는 '실재 역사'를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고고학적 서술' 내지 '인류학적 서술'이다. 고고학이란, 과거의 실재인 유물을 뒤덮고 있는 두터운 지층 ―이것은 '지질학적' 의미로서의 지층만이 아니라 '역사학적' 의미로서의 지층을 가리키기도 한다―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다.
'실재' 유물을 왜곡시키는 두터운 지층을 제거할 때 비로소 '실재' 유물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인류학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실재' 토착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의 관념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시각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관념의 지층을 걷어내고 토착인이 될 때에야 비로소 그 문화를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스도 이런 '텍스트'들이 '실재 역사'에 대해서 잊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것들을 복원시키기 위해 텍스트들의 지층을 파고 내려간다. 그런 텍스트들을 작성한 '판사', '지식인', '상위 계층'과 같은 사람들의 지층을 파헤침으로써 그 밑에 묻혀져 있던 '농부', '하층민', '문맹인' 등과 같은 '역사 아래'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굴해내게 되는 것이다.
3. 끊없이 이어지는 텍스트들
이상에서 보았듯이,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역사서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기존의 역사 서술은 보지 못하던, 그리고 보지 않으려던 부분들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역사 서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실재 역사'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분명 그것은 아니다.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아무리 많은 텍스트의 지층을 파고 내려갔다고 한들 결국에는 파헤치지 못할 지층이 하나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살고있는 '당대'이다. 그녀가 아무리 당대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노력한들, 가장 본질적으로 그녀를 '당대의 사람'이게 만드는 존재 범주에 대한 것은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실재역사' 복원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역시도 실재 역사가 아닌 또 하나의 '텍스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작업이 평가 절하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는 "역사 속의 모든 것은 '텍스트'로 치환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실재'가 존재한다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해내는 것은 결국, 우리의 관념. 따라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실재'가 아닌 '실재에 대한 해석으로써의 텍스트'이다.
결국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역시 이 끝없는 텍스트의 고리에 그녀만의 또 다른 '텍스트'를 첨가한 작업을 수행한 것이며, 이는 인간 역사의 본질에 의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보다 더 멀리 올라가, '진짜 마르탱 게르'의 존재범주를 스스로 형성해내고자 했던 '가짜 마르탱 게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짜 마르탱 게르 이야기'라는 '텍스트'로 전해져 내려오는 '실재 역사'에 대한 최초의 '텍스트 제작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짜 마르탱게르'는 스스로 '역사적 텍스트'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텍스트로 이루어진 인간역사의 흐름에 그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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