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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감자밭에 풀을 매러 갑니다.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풀을 맬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즈음부터는 볕이 나기 전 새벽녘이나 해 넘어 가고 난 뒤라야 밭일을 하기 편합니다.

며칠 사이에 감자밭과 옥수수밭은 풀밭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감자밭의 풀을 매고, 여러 개 난 감자 순도 뽑아주고, 감자 순 주위에 흙을 더 덮어 북돋아 줍니다.

옆의 밭에서는 연로하신 집안 숙모님 한 분이 옥수수 밭을 매고 있습니다.
약을 했는데도 그새 풀이 또 나와 부렀어, 징하네 징해.
그라요야 아침에 풀을 매고 돌아서면 저녁 참이면 또 수북해 부리요잉.

숙모네 밭과 내 밭 사이 밭둑으로도 풀이 무성합니다.
거그도 잔 약을 치게.
언능 씨 떨어지기 전에 약을 쳐야제.
거그 씨앗이 날리기 시작하먼 백날 천날 밭에 풀 메봐야 소용 읎응께.

그래야 지라우.
나는 제초제를 뿌릴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알았다고 수긍하는 척 합니다.

감자밭과 옥수수 밭에도 약을 쳐서 풀을 죽이고 심으라는 마을 노인네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참인데, 굳이 밭둑의 풀들에게 농약을 줄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습니다.
그래도 못 하겠다고는 못하고 알았다고 합니다.

노인 분들도 약을 하는 것이 땅에 안 좋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요.
다만 그분들 노동력만으로는 약을 하지 않고 풀을 매가며 농사 짓기가 버거워 그리도 부지런히 약을 뿌려 대는 것일 테지요.

내 젊은 몸으로도 한나절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매다보면 온 삭신이 쑤시고 아픈데 노인네들 늙은 삭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약을 치지 않았더니 풀이 참 징하긴 징합니다.
옥수수 밭이고 콩밭이고, 감자밭이고 간에 풀반 곡식 반입니다.
숙모님은 당신네 밭을 다 매시고 내 밭 매는 것을 거들러 오십니다.

놔 두씨오. 내가 천천히 맬라우.
상관 말고 언능 일이나 하시게.
고맙긴 하지만 죄송스럽습니다.

근디 숙모, 메주콩을 쪼금 일찍 심었더니 비둘기들이 다 잡숴 부럿오야.
그러게 남들 심을 때 같이 심어야지,
그래야 비둘기들한테 덜 뺏기지. 이 밭에 가서도 먹고 저 밭에 가서도 먹고 그래야 내 밭의 콩을 덜 앳기지.
비둘기들 존 일만 시켰네, 담부터는 놈들이랑 같이 심게, 머든지.
그래야 것구만이라우.

살아도 사재, 죽어도 사재.
풀을 메시던 숙모님이 뜬금 없이 한탄을 합니다.
살아서도 웬수, 죽어서도 웬수.

숙모님은 내 밭 옆에 있는 오춘님의 묘를 보며 탄식을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 풀이 무성합니다.
뮛등에는 퇴비도 안하고, 비료도 안 뿌리는데 땅은 거름 지고, 풀들은 어찌 저리도 잘도 자라는지.

살아서도 고생만 고생만 원 없이 시키더니 죽어서까지 고생을 시켜.
풀을 저렇게 많이도 자라게 해 일년에도 몇번씩 벌초하게 만든다께, 저 웬수가.

웬수도 저런 웬수가 읎어.
술만 먹고 살다가 병이 나서 조금 조심하더니 약 먹고 몸 좀 좋아질만하니까 또 술을 처먹어, 그러더니 암 걸려 뒈져 부럿어.
사재도 저런 사재 넉시가 읎어.

나는 묵묵히 감자밭을 매고 숙모는 가만히 오춘님 무덤가로 가 풀을 뽑기 시작합니다.
해는 넘어가 어둑하고, 이제 갓 줄에 묶인 새끼 염소들 울음소리 애절합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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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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